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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11호(문예중앙시선)(2)

벌레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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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여정 지음
출판사
문예중앙 | 2011.02.28
형태
판형 A5 | 페이지 수 147 | ISBN
ISBN 10-8927801903
ISBN 13-9788927801900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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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바코드 시대의 카프카,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
‘미래파’의 산파이자 기원이었던 시인, 드디어 베일을 벗다


이것은 바코드 시대의 카프카일까?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일까?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이름은 벌레 11호이다. ‘벌레’라는 카프카적 존재와 ‘11호’라는 이상식 기호의 음습한 합체. 그 언어는 순수하지도 않고 명징하지도 않다. 일반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없다. 악성코드들에 감염되고 오염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시인의 언어. "자판기월드"와 "음성기록파일" 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뇌의 실직, 입의 휴가, 귀의 출장" 같은 기이한 단절들로 살아간다는 것. 이제 벌레 11호의 일은 이 불구의 세계를 온몸으로 기어가는 것 자체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나는 이제 이 긴 의태어들을, 이 아픈 문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으려고 한다. 그것이 벌레 11호를 만나는 가장 깊은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장욱, 시인

열망과 파격으로 들끓게 되어 있던 것이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몸을 조금 바꿀 때마다 어김없이 차오르는 것이 열망이 아니고 비애이며 전신轉身의 계기가 근사한 파국이 아니라 매양 지리멸렬일 때...... 그는 계량한다. 여정은 생활의 비애를 계량하는 시인이다. 감정의 ‘모던 타임즈’가 그의 언어적 생산라인의 플랜이다. 그리고 이 공정에 힘입어 편력은 세공의 스승이 된다. 생의 일모도원, 계량의 일기당천, 그것이 여정 시의 내력이자 비원이다. 덤벼라 생활, 출동, 이상 11호, 김수영 13호!─조강석, 문학평론가

조연호 시인의 [농경시]를 시작으로 문예중앙에서 선보이는 ‘문예중앙시선’의 두 번째 시집, 여정 시인의 [벌레 11호]가 출간되었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여정은, 이장욱(1994년 등단), 김행숙(1999년 등단)과 함께,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의 들머리에 놓인 시인이다. 그는 [자모의 검], [모자 속의 산책], [달아나다]와 같은 빛나는 시편들과 함께 시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시는 새로운 시어와 빛나는 감수성으로 고통을 눅여낸 몸의 풍경을 그려내 문단의 찬사를 받았다.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 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 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자모의 검] 부분, 12쪽

달아 나다. 네 옆에 있는 어둠이다. 달아 나다. 너를 키워낸 엄마다. 자궁 속은 늘 어두운 법, 그 법 속에 우리가 산다. 산다는 건 어쩌면 뿌연 안개 속에서 달아날 구멍을 찾는 것, 구멍은 늘 무덤 가까이 있다. 탈출자의 명단이 거기 새겨져 있다. 달아, 나 오늘 탈출자의 뒤를 밟아봤다. 어둠에 젖은 길을 지나 안개 속을?헤집고, 쏙 사라져버린 그 넓은 보폭과 그 빠른 걸음에 매달려봤다. 하지만,
─[달아나다] 부분, 18쪽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그의 시는 시사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던 일군의 새로운 시인들의 경향을 미리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단이 그의 성가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당시 문단이 그를 알아보았다면 어땠을까? 새로운 시의 시대가 적어도 5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13년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왔다.

카프카와 이상, 그리고 디지털 동화 묵시록
그가 침묵하는 동안, 우리 시는 실로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많지 않았던 그의 시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출발했던 그 모습에서 한 걸음더 진화한,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디지털 시대의 유물론적 풍경 속에 카프카적 몽환과 이상李箱적인 불안을 버무린 세계, 그가 축조한 새로운 세계다. 또 여기에 새로운 버전의 동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이미 다 커버린 아이가 겪는 기묘한 모험담을 그려낸다. 그 이야기들은 천진한 묵시록이자 바코드 시대의 블랙유머다.

탈피.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몸을 벗어버리고 싶다. 이제 그만 날아오르고 싶다. 직장을 버렸다. 일상을 벗었다. 몸이 희미해졌다. 눈은 퀭해졌다. 날개가 돋았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더듬이를 잃었다. 식욕이 떨어졌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드르륵 돌아간다. 내 날개에 그물이 있었다. 날개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간다. 드르륵 걸어((날아))간다. 다시.
─[하루살이 백수] 부분, 80쪽

이브의 재산목록 8호인 에로이카전축에서 검은 음표들이 꿈틀대며 기어나온다. 벌레 11호의 몸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검은 알들을 낳는다. 알 1호를 깨고 이브의 첫사랑이 웃고 있다. 알 2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2호가 웃고, 알 3호를 깨고 LG냉장고가 웃고 있다. 알 4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4호가, 알 8호를 깨고 에로이카전축이, 알 12호를 깨고 빨간색 티뷰론이, 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 있다.
─[애인 13호] 부분, 102쪽

세계, 고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꾼다는 것

21세기 피노키오가 갇혀 있는 "물고기 뱃속은 너무 넓"고 "끝이 없"다. "어차피 뿌리 없는 날들"에 "거짓말 사이에서 태어난 목각인형"들에 불과한데, 이러한 거짓의 후손들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언어 탐구나 언어의 구성적 운산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서투른 기투企投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거짓말을 "유일한 물과 양분"으로 삼아, 스스로의 언어적 육체를 위악의 검으로 자해하는 길 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악이 단순한 원한 감정(resentiment)의 테두리를 넘어 밀도 높은 절망의 단계에 당도할 수 있었기에, 그것은 바야흐로 의미 없는 자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어떤 한계를 증언하는 시적인 언어가 되기에 이른다.
(...)
여정의 시를 그 기층에서부터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살아 있음으로 인해 비롯되는 자기 모멸감이다. 그리고 그 모멸은 삶의 아주 구체적인 세목들로부터 얻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상의 언어가 목표가 아니라 순수한 도구적 형식으로 기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시 말해 단순히 언어에 대한 유희적 향락을 느끼기 위해 이상에 대한 패러디나 혼성모방이 감행된 것이 아니다. 이상으로부터 남겨진 그 형해와 같은 시적 유산들은 여정의 시 텍스트에서 외화된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낙서화의 형식으로 언어의 실존에 새겨져 있다.

그처럼 살아 있음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모멸의 시간들을 이 시집은 음산하게 영사시키고 있다. 자신을 베고 찌르고 부수는 행위들로 인해 마침내 병든 말들은 깨지고 부서져서 작은 조각들이 된다. 여정은 그 경험과 언어의 파편들을 때로는 무의미하게 부표(浮漂)시키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환상적 공간을 조립하기 위한 재료로 동원시킨다. 그 환상 속에서 시적 화자의 영락(零落)한 실존이 미약하게, 그러나 한없이 꿈틀거린다.
─강동호 해설, [환상수난곡] 중에서

해설자의 말처럼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어떤 손쉬운 희망도, 타협도, 연대도 없는 디스토피아의 공간이다. 거기서 감정이 휘발된 이상한, 고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고통이 병리적이거나 자폐적인 주이상스는 아니다. ‘벌레 11호’가 되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하는 가운데, 그 꿈틀댐으로 세계에 긴 획을 긋고,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는 이의 강인함이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벌레는 제 몸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여정의 벌레는 그 꿈틀댐 자체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낸다. 어쨌거나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그 천진함의 세계로 시인은 독자들을 안내한다.

여정의 진정한 시적 여정이 시작되다
그의 시는 추상어와 감정어들에 기대지 않고서도 삶의 저 아래에까지 닿는 눅진한 정서로 가득하다. 말은 간명하고 이야기는 정제되어 있으나, 거기서 얻어지는 감각은 실로 폭발적이다. 환상적인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은 고백인 진술, 저 자신을 낯선 인물로 제시하는 삼인칭의 서정, 잔혹동화 속에 숨은 삶의 연대기 등 시인 여정은 다양한 화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가상의 고통과 실재의 고통이 서로 전이되는 과정들, 몸속과 몸 밖을 넘나드는 세계와 관계 인식, 생의 기원과 매 순간의 호흡과 견딤의 긴장된 경계에 시인은 주목한다. 벌레 11호, 애인 13호 들의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몸짓의 언어들. 그가 휘두르는 자모子母의 검을 접하는 독자들은 가슴이 서늘하게 베일 것이다. 이제 시인 여정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저자소개

저자 여정

저서 (총 1권)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목차

1부
자모의 검
칼질
좌석버스 안에서
……[레드 바이올린]을 되감으며
달아나다
필락 말락 해바라氏
고정된 사내
질긴 안개
모자 속의 산책
어머니와 경비행기
어느 나뭇잎의 노래
쥐며느리
늙은 방
모텔선인장
달과 나무

2부
아버지께 감사를……
게맛살
네게 거짓말을 해봐?!
음식환상
식탁에 박힌 눈알들
기름보일러는 돌아가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 날
사막과 섬을 잇는 낙타
카멜레온
암치질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황금박쥐
新토끼전, 동화 속에서 길을 잃다
인형의 방
자화상
피노키오 2세의 자기진술서

3부
새앙쥐
원룸
망막일기
비가,
자판기 앞에서
가끔 머리를 묶는다
꽃/똥
쥐와 쥐
셋방에는
봉산동 붕어
혼혈아
하루살이 백수
미완의 노을
지하철((지옥철))
((悲))

4부
벌레 11호
눈이 아픈 아이를 위한 랩소디
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1
모니터에 비친 자화상
21C 클로세움
케이블 가이
애인 13호
ACE침대 위의 ♂♀
바코드機♀를 위한 랩소디
콘센트♀의 하루
빈집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
897살 먹은 사내와 자판기월드
아니,

해설
환상수난곡ㆍ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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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코드 시대의 카프카,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
‘미래파’의 산파이자 기원이었던 시인, 드디어 베일을 벗다


이것은 바코드 시대의 카프카일까?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일까?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이름은 벌레 11호이다. ‘벌레’라는 카프카적 존재와 ‘11호’라는 이상식 기호의 음습한 합체. 그 언어는 순수하지도 않고 명징하지도 않다. 일반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없다. 악성코드들에 감염되고 오염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시인의 언어. “자판기월드”와 “음성기록파일” 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뇌의 실직, 입의 휴가, 귀의 출장” 같은 기이한 단절들로 살아간다는 것. 이제 벌레 11호의 일은 이 불구의 세계를 온몸으로 기어가는 것 자체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나는 이제 이 긴 의태어들을, 이 아픈 문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으려고 한다. 그것이 벌레 11호를 만나는 가장 깊은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장욱ㆍ시인

열망과 파격으로 들끓게 되어 있던 것이 삶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몸을 조금 바꿀 때마다 어김없이 차오르는 것이 열망이 아니고 비애이며 전신轉身의 계기가 근사한 파국이 아니라 매양 지리멸렬일 때…… 그는 계량한다. 여정은 생활의 비애를 계량하는 시인이다. 감정의 ‘모던 타임즈’가 그의 언어적 생산라인의 플랜이다. 그리고 이 공정에 힘입어 편력은 세공의 스승이 된다. 생의 일모도원, 계량의 일기당천, 그것이 여정 시의 내력이자 비원이다. 덤벼라 생활, 출동, 이상 11호, 김수영 13호!─조강석ㆍ문학평론가

조연호 시인의 『농경시』를 시작으로 문예중앙에서 선보이는 ‘문예중앙시선’의 두 번째 시집, 여정 시인의 『벌레 11호』가 출간되었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여정은, 이장욱(1994년 등단), 김행숙(1999년 등단)과 함께,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의 들머리에 놓인 시인이다. 그는 「자모의 검」, 「모자 속의 산책」, 「달아나다」와 같은 빛나는 시편들과 함께 시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시는 새로운 시어와 빛나는 감수성으로 고통을 눅여낸 몸의 풍경을 그려내 문단의 찬사를 받았다.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 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 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자모의 검」 부분, 12쪽

달아 나다. 네 옆에 있는 어둠이다. 달아 나다. 너를 키워낸 엄마다. 자궁 속은 늘 어두운 법, 그 법 속에 우리가 산다. 산다는 건 어쩌면 뿌연 안개 속에서 달아날 구멍을 찾는 것, 구멍은 늘 무덤 가까이 있다. 탈출자의 명단이 거기 새겨져 있다. 달아, 나 오늘 탈출자의 뒤를 밟아봤다. 어둠에 젖은 길을 지나 안개 속을?헤집고, 쏙 사라져버린 그 넓은 보폭과 그 빠른 걸음에 매달려봤다. 하지만,
─「달아나다」 부분, 18쪽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그의 시는 시사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던 일군의 새로운 시인들의 경향을 미리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단이 그의 성가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당시 문단이 그를 알아보았다면 어땠을까? 새로운 시의 시대가 적어도 5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13년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왔다.

카프카와 이상, 그리고 디지털 동화 묵시록
그가 침묵하는 동안, 우리 시는 실로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많지 않았던 그의 시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출발했던 그 모습에서 한 걸음 더 진화한,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디지털 시대의 유물론적 풍경 속에 카프카적 몽환과 이상李箱적인 불안을 버무린 세계, 그가 축조한 새로운 세계다. 또 여기에 새로운 버전의 동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이미 다 커버린 아이가 겪는 기묘한 모험담을 그려낸다. 그 이야기들은 천진한 묵시록이자 바코드 시대의 블랙유머다.

탈피.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몸을 벗어버리고 싶다. 이제 그만 날아오르고 싶다. 직장을 버렸다. 일상을 벗었다. 몸이 희미해졌다. 눈은 퀭해졌다. 날개가 돋았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더듬이를 잃었다. 식욕이 떨어졌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드르륵 돌아간다. 내 날개에 그물이 있었다. 날개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간다. 드르륵 걸어((날아))간다. 다시.
─「하루살이 백수」 부분, 80쪽

이브의 재산목록 8호인 에로이카전축에서 검은 음표들이 꿈틀대며 기어나온다. 벌레 11호의 몸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검은 알들을 낳는다. 알 1호를 깨고 이브의 첫사랑이 웃고 있다. 알 2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2호가 웃고, 알 3호를 깨고 LG냉장고가 웃고 있다. 알 4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4호가, 알 8호를 깨고 에로이카전축이, 알 12호를 깨고 빨간색 티뷰론이, 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 있다.
─「애인 13호」 부분, 102쪽

세계, 고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꾼다는 것

21세기 피노키오가 갇혀 있는 “물고기 뱃속은 너무 넓”고 “끝이 없”다. “어차피 뿌리 없는 날들”에 “거짓말 사이에서 태어난 목각인형”들에 불과한데, 이러한 거짓의 후손들에게 있어 형이상학적 언어 탐구나 언어의 구성적 운산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서투른 기투企投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거짓말을 “유일한 물과 양분”으로 삼아, 스스로의 언어적 육체를 위악의 검으로 자해하는 길 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악이 단순한 원한 감정(resentiment)의 테두리를 넘어 밀도 높은 절망의 단계에 당도할 수 있었기에, 그것은 바야흐로 의미 없는 자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어떤 한계를 증언하는 시적인 언어가 되기에 이른다.
(…)
여정의 시를 그 기층에서부터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살아 있음으로 인해 비롯되는 자기 모멸감이다. 그리고 그 모멸은 삶의 아주 구체적인 세목들로부터 얻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상의 언어가 목표가 아니라 순수한 도구적 형식으로 기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시 말해 단순히 언어에 대한 유희적 향락을 느끼기 위해 이상에 대한 패러디나 혼성모방이 감행된 것이 아니다. 이상으로부터 남겨진 그 형해와 같은 시적 유산들은 여정의 시 텍스트에서 외화된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낙서화의 형식으로 언어의 실존에 새겨져 있다.

그처럼 살아 있음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모멸의 시간들을 이 시집은 음산하게 영사시키고 있다. 자신을 베고 찌르고 부수는 행위들로 인해 마침내 병든 말들은 깨지고 부서져서 작은 조각들이 된다. 여정은 그 경험과 언어의 파편들을 때로는 무의미하게 부표(浮漂)시키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환상적 공간을 조립하기 위한 재료로 동원시킨다. 그 환상 속에서 시적 화자의 영락(零落)한 실존이 미약하게, 그러나 한없이 꿈틀거린다.
─강동호 해설, 「환상수난곡」 중에서

해설자의 말처럼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어떤 손쉬운 희망도, 타협도, 연대도 없는 디스토피아의 공간이다. 거기서 감정이 휘발된 이상한, 고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고통이 병리적이거나 자폐적인 주이상스는 아니다. ‘벌레 11호’가 되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하는 가운데, 그 꿈틀댐으로 세계에 긴 획을 긋고,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는 이의 강인함이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벌레는 제 몸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여정의 벌레는 그 꿈틀댐 자체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낸다. 어쨌거나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그 천진함의 세계로 시인은 독자들을 안내한다.

여정의 진정한 시적 여정이 시작되다
그의 시는 추상어와 감정어들에 기대지 않고서도 삶의 저 아래에까지 닿는 눅진한 정서로 가득하다. 말은 간명하고 이야기는 정제되어 있으나, 거기서 얻어지는 감각은 실로 폭발적이다. 환상적인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은 고백인 진술, 저 자신을 낯선 인물로 제시하는 삼인칭의 서정, 잔혹동화 속에 숨은 삶의 연대기 등 시인 여정은 다양한 화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가상의 고통과 실재의 고통이 서로 전이되는 과정들, 몸속과 몸 밖을 넘나드는 세계와 관계 인식, 생의 기원과 매 순간의 호흡과 견딤의 긴장된 경계에 시인은 주목한다. 벌레 11호, 애인 13호 들의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몸짓의 언어들. 그가 휘두르는 자모子母의 검을 접하는 독자들은 가슴이 서늘하게 베일 것이다. 이제 시인 여정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책속으로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수프를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조금 더 갈라놓는다
나는 돈까스 위에 그녀를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는 비후까스 위에 나를 살짝 올려놓는다
나는 왼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왼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나는 6번의 칼질로 그녀를 19조각 낸다
그녀는 5번의 칼질로 나를 16조각 낸다
하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똑같이 샐러드를 먹는다
─「칼질」 부분, 14쪽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에라도 눌리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고정된 사내」 부분, 21쪽

길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때 살과 뼈였던 하얀 폐곡선을 드러낸 채 점점 얼룩지고 있었다. 피는 꽃처럼 피어나지 않는다. 그저 얼룩만 질 뿐, 비린내만 진동할 뿐, 암치질이 자꾸 밖으로?삐져나오는 길을 걷는다. 어둠을 찢으며 질주하는 한 가닥 가로등 불빛, 그 아래 비둘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집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암치질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부분, 49쪽

∥♀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를 스쳐가는 혹은 스쳐간 남자들은 모두∥얼룩말을 탄 ♂이거나 숫자들에 끌려다니는 줄무늬 옷을 입은 ♂들뿐∥♀의 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의 망막에 쌓여가는 줄무늬들∥♀를 가두고∥♀는 줄무늬로 세상을 가두고∥비는 계속 내리는데∥젖지 않는 사람들∥철판 위에서 뼈 없는 닭갈비를 먹으며 뼈 없는 얘기들을 뱉어내는데∥백마 탄 왕자님이 지나갔는지도 모른다∥얼룩말을 탄 ♂들과 숫자들에 끌려다니는 줄무늬 옷을 입은 ♂들에 뒤섞여∥줄무늬 ♂가 되었는지도∥
─「바코드機♀를 위한 랩소디」 부분,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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