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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종이책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8)

저자
이반 일리히 , 이반 일리치 , 배리 샌더스 지음
역자
권루시안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 2016.09.05
형태
판형 규격外 | 페이지 수 272 | ISBN
원제 : ABC: The Alphabetization of the Popular Mind
ISBN 10-8954642195
ISBN 13-9788954642194
정가
16,000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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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의 문명비판가이자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와 중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배리 샌더스가 협력해 12세기 르네상스의 타임캡슐을 연다. 전 세계가 영어교육의 지배 아래 놓여있고, 모국어가 민족 정체성 유지의 해답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문자 문화의 참모습을 추적한다. 중세기 고문서를 연구하던 두 저자는 자료와 질문을 모아 말과 글의 역사, 스콜라적 책읽기와 개인의 탄생, 말이 힘과 생명력을 잃고 창백하게 굳어져버린 과정들을 생생히 빚어낸다.

저자소개

저자 이반 일리히

저서 (총 9권)
이반 일리치만큼 논쟁적이며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 시대의 사상가도 드물다. “가장 급진적 사상가”(TIME)이자 “위대한 사상가”(가디언)였고, 주류 체제를 떨게 하는 “지식의 저격수”(뉴욕타임스)였다. 12개 국어에 능통하고, 화학과 신학, 역사를 전공했으며 그가 현대 사상에 끼친 영향은 사회학, 철학, 신학, 역사학, 과학기술을 넘나든다. 하지만 그는 어떤 범주와 분류에도 넣을 수 없는 사상가이다.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중부 유럽을 떠돌다가 나치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피신한 후, 화학ㆍ신학ㆍ역사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다. 195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교황청 국제부직이 예정되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보좌신부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956년 서른 살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1966년 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해 당시 전 세계가 숭배하던 개발 이념에 도전했다. 이 센터는 급진 운동의 근거지이자 사상의 싱크탱크가 되었다.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1971년 『학교 없는 사회』를 발표한 후, 『공생을 위한 도구』, 『의학의 한계』 등으로 현대 문명에 근원적 도전을 던지며 세계적 사상가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현대 관념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12세기로 거슬러 오르는 사상적 여정을 시작해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등을 출간했다. 사회학ㆍ철학ㆍ경제학ㆍ여성학ㆍ종교학ㆍ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며, 가장 근원적이기에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평가 받는다. 말년에는 한쪽 뺨에 자라는 혹으로 고통 받았지만 현대식 의료 진단과 치료를 거부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에서 눈을 감았다. 〈가디언〉, 〈르몽드〉, 〈뉴욕 타임즈〉 등은 사후 특집 기사 등을 통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보수주의자에게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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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반 일리치

저자 배리 샌더스

목차

머리말
1. 낱말과 역사
2. 기억
3. 글월
4. 번역과 언어
5. 자기
6. 허위와 서술
7. 교습되는 모어에서 새말과 꽥꽥일률로
후기ㅡ침묵과 우리
간추린 참고문헌

이반 일리치 연보
옮긴이의 말
주요 용어와 고유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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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이미지

‘침묵과 우리’로 향하는 말과 글의 역사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 책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여는 대표작!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작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국내 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얼마 전 나온 『텍스트의 포도밭』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특히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그 속편 격인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물론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는 현대사회의 시초로서 민중의 마음(심성, 지성)이 문자화(알파벳화)된 데 초점이 있지만, 넓게 보면 ‘테크놀로지로서의 문자와 읽기 기술’이라는 동일한 범주를 다루기에 두 책 간의 연관성은 생각보다 깊다.

즉 『텍스트의 포도밭』의 태반이 되고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문화적 맥락(context)을 보여주는 자궁 같은 책이 바로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인 것이다. ‘지식의 양식으로서 말과 글이 지닌 영향력’에 관해 배리 샌더스와 나눈 대화가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1988)라는 책이 됐고, 이후 이 책 속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text)을 묵상하는 것’이다”라는 위그의 말이 실마리가 되어 『텍스트의 포도밭』(1993)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 있기에 두 책은 나란히 읽을 때 더 큰 울림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분위기가 다른, 고전학자 이반 일리치를 보게 된다. 다급한 현안 앞에서만 신중하고 단호하게 대안을 제시하던 비판가, 생산성 과잉에 빠진 서구 산업사회와 그 바탕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질타함으로써 자극과 성찰을 이끌던 날카로운 사상가는 이제 사회 비판보다 인간 개개의 내면 탐색에 치중한다. 이것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의 문을 닫고 벗들과 책 읽고 묵상하고 대화 나누며 살던 1980년대 후반의 일리치다. 구체적인 개별 현안에 몰두하던 면모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일리치에게서 학교, 병원, 운송수단 등 제도화된 사회의 폐해를 경고하는 선지자적 외침이 컸다면 이제는 이 사회를 만든 우리의 안쪽, 나이테의 중심을 향한 운동이 돋보인다. 12세기 스콜라철학의 거장 생빅토르의 위그가 말한 렉티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의 열망이 동반된 이 여정은 구술의 상실, 시각적 책의 탄생, 번역과 토박이말의 분화, 문법의 힘, 자기(the self)와 자서전의 발명, 반문맹 문자의 구속, 인공어 새말의 폭력 등 귀 중심에서 눈 중심으로의 변화를 다양한 예를 들어 탐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상상도 못할 만큼 멀리 떠밀려와, 방대한 정보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어떻게 참뜻에 닿을 수 있을까? 여정의 끝자락에서 이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말없이 나누는 ‘우리’와 ‘침묵’이 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용 소개】

두 개의 구렁, 두 갈래의 길

이반 일리치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역시 서양 중세 문학을 공부한 중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배리 샌더스와 나눈 ‘우정 어린 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봤을 때 그가 활동하던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독서와 토론을 바탕으로 왕성하게 책을 내던 1970년의 공동 작업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이 글을 쓴 목적이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뭔가를 권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를 안겨준 역사 그 자체를 묘사만 할 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는 추측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바는 뚜렷하고 매우 울림이 크다. 우선 이들은 광범위하게 문자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보면, 인류 앞에는 인식론적 단절을 가져온 두 개의 깊은 구렁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의 구술문화와 단절을 가져온 구렁,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 코앞에 와 있는, 문자를 정보의 조각처럼 여겨 읽기와 쓰기를 정보처리 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구렁이다. 두 저자는 이 위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밝히는 데 집중한다. 오늘날 문자는 강제적인 문자 교육 때문에 기능 문맹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음에도 한편으론 언어가 정보체제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보루가 된 역설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 탐구는 두 가지 경로를 따라 이루어진다. 하나는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빅토르의 위그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경로, 다른 하나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다쟁이 배스의 아내에서 마크 트웨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허클베리 핀에 이르는 경로다. 다시 말하면, 이 대조적인 두 갈래 길이 하나는 침묵과 묵상에, 다른 하나는 수다와 거짓말에 각각 바쳐질 것이란 점을 알려준다.

* 그럼, 이제 이 구도를 마음속에 새기고 각 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머리말을 빼고 모두 일곱 장―‘낱말과 역사’ ‘기억’ ‘글월’ ‘번역과 언어’ ‘자기’ ‘허위와 서술’ ‘교습되는 모어에서 새말과 꽥꽥일률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후기가 붙어 있다. ‘간추린 참고문헌’ 또한 본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톡톡히 하므로 그것까지 주의깊게 봐야 한다. 일리치와 샌더스가 밝힌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을 성찰해보자는 두번째 구렁에 관한 내용은 말미에 가서야 나온다. 먼 과거로부터 역사를 훑어오기에 생긴 당연한 결과다. 그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 풍부한 고전학적 지식이 발휘되면서 시기별로 말의 동결화 과정, 말의 문자화 과정에 대한 묘사들이 감탄할 만큼 시적으로 펼쳐진다. 짧지만 아름답고 심오한 이 책이 일으키는 마음의 파문을 보려면 직접 책을 펼쳐 읽는 수밖에 없다.

알파벳의 발명 ― 구술 시대의 ‘날개 달린 말’을 붙잡다
첫번째 장 ‘낱말과 역사’에서 일리치와 샌더스는 알파벳 문자가 생겨나기 전에 말이 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말을 인용해 역사 이전에 기예와 지식의 규칙이 아닌 신성한 열정과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 펼쳐지는 설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구술로 이루어지는 이 설화 시대에는 생각 자체가 날개를 타고 날아오른다. 이야기는 말과 분리될 수 없고 마치 날아가고 있는 새처럼 한곳에 있다가도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이야기꾼은 저만의 실타래를 자아내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 없이, 끝없이 이어간다. 소리는 덧없이 사라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문자를 글로 적음으로써 소리를 그곳으로부터 구출해낸다. 그렇게 살아 있는 말은 필경사에 의해 해체된다. 필경사는 구술되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음미해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뿌리를 고찰해 점토판에 새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시뷜라 덕분에 고대 희랍인은 더이상 델포이의 퓌티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신탁을 알아듣고자 애써 귀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시뷜라가 시간이라는 맥락 속에 들어 있는 말을 시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알파벳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신탁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문자가 가져온 첫번째 변화 ― ‘기억’을 보는 상반된 관점
역사 이전 시대 구술문화가 지닌 특성을 설명한 뒤, 두번째 장에서는 ‘기억’이 다뤄진다. 오늘날 우리는 문자가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소리글자라는 유일무이한 이 표기체계 알파벳이 없던 시대에는 사회의 지속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말의 흐름을 문자로 붙잡을 수 있게 된 뒤에야 지식을 기억 속에 보관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겼고 서기전 4세기에 이미 사람들은 기억을 ‘열고 뒤지고 활용할 수 있는 저장고’로 이해했다.
이런 관념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고전학자 밀먼 패리의 업적은 거의 아인슈타인에 가깝다. 패리 덕분에 선사시대의 구술 전승에서는 회상과 행동 간에 구분이 없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중세 시인은 시를 짓기 위해 기억의 저장고를 뒤적이지만 알파벳 이전 시대의 노래하는 시인은 그러지 않았다. 선사시대의 호메로스는 글을 몰랐다. 음송시인으로 마음속에 담긴 무수히 많은 정형구와 상투어를 그때그때 육보격 박자에 실어 이야기로 엮어냈을 뿐이다. 즉 말과 생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노래했다. 패리와 그의 조수 앨버트 로드가 이 가설을 발칸반도 세르비아 구슬라르 같은 전통 민요 가수들을 통해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한 사실이다.
서기전 4세기의 플라톤은 구술문화의 문턱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산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키고 있던 므네모시네(기억)의 샘으로 계속 돌아가고자 했다. 문자가 명상적 성찰을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토트 신 이야기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문자를 발명한 신 토트는 테바이 왕 타무스를 찾아가 회상 능력과 지능을 강화시켜주는 약(파르마콘)이라며 자신의 발명품인 문자를 쓸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타무스는 그 제안을 거절하는데, 파르마콘은 약이면서 독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전시대에 기억은 두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전자가 생각과 동시에 태어나는 것이라면, 후자는 세밀한 기법이나 연습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강가로 나가 플라톤이 말한 먼 회상 저편에서 잃어버린 것과 ‘비슷한’ 나뭇조각을 주워오는 여행은 이제 기억의 저장고로 향하는 여행으로 바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보관된 예전의 감흥을 통해 지식을 찾아낸다.” 이로부터 수사학이 발생한다. 고대의 수사학은 기억술이었다. 즉 인위적인 것이었다. 널찍한 건물을 짓고 그 내부에 기억을 새긴다. 창고, 다락, 계단, 전실, 후실마다 특정 이미지가 자리하게 한다. 날개 달린 낱말들을 일정한 틀 안에서 매번 다르게 엮어내던 음유시인의 즉흥적인 노랫소리는 사라지고 이제는 기억의 궁전 속에 이미지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게 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시는 그림처럼”) 기억은 날개를 잃고 한자리에 붙박인 채 이미지로 화한다.
이미지화로 요약할 수 있었던 고대의 이 기억술이 스콜라철학에 와서는 기억을 의지나 지성처럼 각자의 영혼에 딸려 있는 기능으로 만든다. 영혼은 이제 자기 양심까지 짊어져야 했다. 수사학적 방법이던 기억은 자기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말로 표현하는 죄의 고백이라는 새로운 활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글월에 잔존하는 구술문화와 ‘새로운 독서법’의 탄생
세번째 장 ‘글월’은 중세 8~9세기 채식 수서본 『린디스판 복음서』와 『켈스의 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리치와 샌더스는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이 두 책이 구술과 묘사적 사고를 가르는 분수령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달리 풀어 말하면, 구술 시대의 노래가 책 속으로 들어가 글월이 되는 진기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중세에도 한동안은 문자문화가 완전히 정착된 게 아니었다. 특히 글자와 그림이 정교하게 어울린 『켈스의 서』는 구불구불 엮여 있는 실의 양식을 통해서도 말을 한다. 이 네 개의 실은 하나로 엮인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복음의 진리에 살을 입히길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 책은 일종의 ‘호메로스적 지면’이며, 먼 옛날 영국에서 구술 구연이 잠시 동안 시각적으로 응결된 것에 해당한다. 가수의 노랫소리 사이사이로 수금 뜯는 소리가 들리듯이, 글자 사이사이로 매듭과 고리가 보조를 맞추며 지면 위에 나타난다. 복음이 시각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세 12~13세기가 되면 글자를 타고 새로운 유형의 사회가 도래한다. 글자는 장사하는 데도 쓰이고 기도 생활을 북돋기도 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데도 쓰이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예컨대 이 시기에 맹세가 글로 적히기 시작하는데 말에 두던 신뢰가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맹세는 야외에서 함선의 옆면이나 방패의 테두리, 검의 날이나 말의 넓적다리, 아니면 자신의 수염이나 고환에 대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면서 이 모든 것들은 성인의 유골, 십자가, 제단, 나아가 복음서로 대체된다. 법정의 맹세 동작에서 복음서를 사용하고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맹세 의식에서 사용하는 말의 형식이 글로 옮겨진다.
맹세뿐만이 아니라 유언장, 양도증서, 법의 영장, 왕의 칙령, 연인 간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퍼진다. 신의가 이런 식으로 문서에 기록되자 신의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한 벌씩 사본을 갖는 게 중요해졌다. 이로부터 원본의 관념이 태어난다. 특히 양도증서 원본은 수도원 원본처럼 보관되지 않고 대법관청을 벗어났기 때문에, 대법관은 남아 있는 사본이 이덴iden이 되게, 즉 원본과 동일하게identical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중세의 글쓰기는 구술을 받아적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구류의 보급으로 책이 점점 시각적인 형태를 띠고 다양하게 특정 요소를 돌출되게 하는 기법들이 발전한다는 점이 특징적일 뿐이다. 문자 배치를 달리하거나 인용문을 다른 색깔로 칠하거나 본문 여백에 색인을 넣는 식으로. 이제 글월과 장식은『린디스판 복음서』처럼 서로 모호한 방식으로 얽히지 않으며 문양은 『켈스의 서』처럼 글줄 안으로 파고드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림 그리기와 채색 작업은 따로 구분됐으며 더러는 서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쳤다. 그러면서 13~14세기를 지나는 동안 삽화와 글이 융합돼 서양의 필사본이라는 멋진 종합체가 등장하는 밑바탕이 마련됐다.
이제 세계는 묘사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놓이게 되었다. 책은 임의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독자의 전거는 이제 구술을 해주는 스승이 아니라 저자로 인식된다. ‘그가 말했다’는 이제 ‘그가 썼다’로 바뀐다. 생빅토르의 말처럼 이 시기, 12세기에 이르면 “내가 네게 읽어줄 수 있고, 네가 내게 읽어줄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에게 명상적으로 읽어줄 수 있는” 독서법도 생겨난다. 우리는 교사가 가르치는 읽기, 학생이 배우는 읽기에서 더 나아간 제3의 읽기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자기에게 읽어주는 독서법, 명상하는 읽기, 묵독이다.

중세 라틴어 ― 번역의 시대가 낳은 ‘언어 통제’라는 이상한 결과
네번째 장 ‘번역와 언어’에서 일리치는 오늘날 언어학자들이 가정하는 호모 모놀링귀스, 인간이란 원래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비판한다. 소쉬르부터 촘스키까지 모두 그 가정에서 출발하지만 언어의 경계가 유동적인 구술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나 중세 때도 마찬가지였다. 번역은 언어의 경계가 선명할 때, 자구대로 하나하나 옮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 때만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언어학자의 이론적 주장과 달리, 아직도 인도네시아 자와 섬이나 사하라 사헬 지역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각기 별개의 언어로 갖가지 담화를 편히 주고받는다. 그들은 설명과 몸짓, 요약으로 상대가 하려는 말의 내용을 알려 하지, 진술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호모 모놀링귀스를 전제하는 이론은 우리를 그릇되게 얽어맬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각지에 퍼지면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그리스도 관련 문헌들이 모두 라틴어로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토박이말은 각 지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말의 권위, 말이 지닌 신성한 힘 또한 라틴어로 전달되고 있었다. 라틴어가 퍼지면서 다양한 로망스어 나라들에서 제 나름대로 발전한다.
‘번역과 언어’의 장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1492년 『카스티야어 문법서』의 출현이다. 이 문법서의 출현으로 민중의 토박이말은 향후 모든 사람이 학습해야 하는 하나의 인공어로 탈바꿈하게 된다. 게다가 이 문법서의 출현 시기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동일한 해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렇게 문법서로 민중의 토박이말이 통일되기 이전까지 유럽은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번역의 시대였다. 물론 이때의 번역이란 현대의 해석학 이론에 따른 번역이 아니다. 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유일한 언어인 라틴어를 거쳐 각 지방의 고유어로 발음하는 과정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글쓰기는 오직 라틴어로 이루어졌지만 이를 토박이말로 발음했던 것이다. 9세기 니타르트의 문서 속에 있는 샤를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독일왕의 맹세, 즉 스트라스부르 맹세가 이를 잘 보여준다. 똑같은 라틴어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르게 자신이 뿌리박은 지역의 언어, 즉 프랑스와 독일어로 맹세했다. 교회의 설교문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라틴어로 기록돼 있을지라도 예배에서는 이를 토박이말로 풀어 읽었다.
콜럼버스와 네브리하는 똑같이 새로운 종류의 제국 건설자 이사벨 여왕에게 힘을 바쳤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당시 최신의 범선을 그 한계까지 활용하여 새로운 스페인이 될 나라 안에서 왕권의 확장을 위해 힘을 쓰겠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네브리하의 청원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었다. 그는 정복이라는 행위 자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면서, 그 영역 안에서 여왕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문법을 활용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만들어내고자 한 영역은 바로 교습을 통해 전달하는 모어의 영역이었다.

‘자기’라는 의식 ― 내면적인 글월의 탄생 조건
다섯번째 장은 ‘자기’라는 의식의 발생을 다룬다. 이 장은 오늘 우리가 그토록 큰 지지대로 여기는 ‘자기정체성’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논하는 데 할애된다. 3세기 양도증서의 확증에서 자기동일성의 개념이 태동했음을 암시하고 더불어 개개, 영어 individual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밝힌다.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이 모나드로서의 자기가 없다면 서술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자기라는 의식과 오늘의 자기라는 의식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개골개골 소리로 밤잠을 깨웠던 개구리와 내가 붙잡아 꼬챙이에 꿸 수 있는 특정 개구리의 차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두 인물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헨리 애덤스.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가난한 리처드 손더스라는 인물로 출발해 근면 검소와 성실한 노력으로 어떻게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는지 보여준다. 리처드 손더는 프랭클린이라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자기를 낳았다. 허나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하는 그 노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 세기에 나온 헨리 애덤스의 『헨리 애덤스의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핸리 애덤스가 들려주는 헨리 애덤스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두 명의 애덤스를 경험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실제 애덤스는 옛 애덤스와, 나이가 든 작가인 새 애덤스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희한한 것은 기억이나 회상을 빌려 문학적으로 창조된 젊은 애덤스가 나름의 생명을 얻어 새 애덤스를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3인칭 골렘은 처분하거나 해결해야 할 대상, 1인칭 안에 병합해야 할 대상이다.
이제는 자기가 자기를 교육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애덤스는 자기를 해석하고 분석했는데, 그 결과 그가 문학적으로 만들어낸 자기가 그에게 들려주는 내용은 그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낳을 뿐 아니라 글월이 또하나의 내면적인 글월을 생성한다.

이야기의 발생 허위와 서술
여섯번째 장 ‘허위와 서술’이다. 픽션fiction의 어원이 되는 핑계레fingere는 생각을 진실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고쳐서 만드는 능력을 뜻했고, 중세에는 이를 나라티오narratio, 즉 서술이라 불렀다. 하지만 중세에 서술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중세 때의 구술이란 신의 입김을 입은 것이었다. 사람이 입에 올릴 수 있는 대상은 다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 또는 명령에 따라 생겨난다. 아담은 하느님의 ‘허구’다. 낙원의 순결한 흙을 다지고 빚어서 만들었다. 따라서 세계는 하느님의 저작에 의존한다. 피조물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창조주에게만 있는 저작권을 침해한다. 1386년 초서가 지은 『캔터베리 이야기』는 이런 중세의 신에게 한정된 아욱토리테(저작권) 관념에서 교묘하게 일탈한다. 초서로부터 문자문화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이 처음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가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할 필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신의 권위, 즉 신에게만 있는 창조의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야기를 통해 자기 능력을 깎아내린다. 청중들에게 사실감을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진실이 아닌 꾸며낸 것임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8세기의 『역병의 해 일지』에서 대니얼 디포는 중산층 독자를 염두에 둔 여러 가지 허구를 창안하면서 초서와는 달리, 자기가 직접 역병을 목격한 사람처럼 꾸민다. 디포는 더이상 신의 저작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당대 사회의 진실에만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소설novel이라는 낱말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제 19세기에 이르러, 우리와 친숙한 작가가 등장한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완전히 문자에 종속된 민중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풍자하면서 저 희한한 미국식 어법인 ‘문자능력literacy’의 세계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 문자문화의 세계에서 올바른 철자법은 올바른 모습의 문자능력을 갖추기 위한 열쇠가 된다. 이것은 사람의 교양 수준을 알 수 있는 가시적인 표시가 되는데, 피부색이 자유냐 노예냐를 가름하는 열쇠가 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말에서는 구두점이나 철자법이 틀려도 표시가 나지 않으며, 오로지 발음이 잘못된 부분만 드러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허클베리는 ‘문명’이란 뜻의 civilization을 말할 때는 제대로 소리 내지만 글로 적을 때는 sivilization이라고 틀리게 적는다.
12세기였다면 루스티코 모레rustico more, 즉 말은 있으나 그에 대응하는 글과 문법은 없는 어떤 방언을 일부러 배우지 않고도 잘 알고 방언으로 대화하는 사람을 가리켰겠지만 이제는 그저 문맹자일 뿐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콧대 높은 방식으로 읽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생빅토르의 위그의 독서법과는 반대로 내면의 자기가 비평가가 되어, 가만히 앉아 소리 없이 허클베리의 실수를 지적하고 고쳐주도록 말이다.

학습되는 모어와 새말
일곱번째 장에서 현대적 상황에 대한 본격 비판이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가 가르쳐준 말을 한 켜 한 켜 쌓아올린 케이크 같은 신체를 갖게 됐다. 이를 무섭도록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오웰의 『1984』이다. 오웰은 이 소설에서 뉴스피크Newspeak, 즉 새말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컴퓨터 언어가 발명되기도 한참 전에 말이다. 오웰의 예언한 대로, 현대의 일상생활에는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아주 낯선, 생경한 신조어가 생겨난다. 이런 현상을 일리치의 동료이자 독일의 중세학자 겸 언어학자인 우베 푀르크젠은 아메바 낱말이라고 불렀다.
사실 오웰의 새말은 1930년대 초에 전성기를 누리며 국가적으로까지 지원되던 베이식 잉글리시Basic English, 즉 기본 영어와 인터글로사Interglossa 등의 인공어 국제어 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안해낸 것이다. 오웰은 소설이 완성된 해인 1948이란 숫자를 뒤집어보다가 우연히 제목을 찾아냈다. 오웰이 비비시 방송에서 기본 영어로 방송을 시작한 해인 1942년을 오웰처럼 뒤집어보면 1492가 만들어진다. 네브리하가 스페인 왕실에 교습되는 모어를 이용해 신민을 통제할 수 있다고 제안한 해 말이다. 『1984』를 출간하기 여섯 해 전, 오웰은 네브리하가 만든 괴물의 후예를 오그던의 기본 영어에서 발견해 그것을 비비시를 통해 방송할 수 있었다. ‘멋진 신세계’를 향해 돛을 올린 것이다. 그러다 결국 오웰은 기본 영어를 버리고 새말이란 패러디를 취한다. 이것이 네브리하에서 오웰까지, 모어를 학습하여 쓰게 될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혀가 묶인 ‘프롤’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변화인 것이다.

침묵과 우리
일리치와 샌더스는 이 책의 맨 마지막 ‘후기’에서 서양 문화에 일반적인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묵상한다. 이들은 영어의 ‘우리’가 아무것도 뜻하지 않게 됐다고 반성하고, 서양의 ‘나’라는 인칭대명사, 1인칭 단수가 담고 있는 의미론적 지평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없이 환기시킨다. ‘나’라는 인칭대명사에 1인칭 복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문화권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면서 침묵의 역사를 되찾고자 한다.

“낱말과 마찬가지로 침묵 역시 알파벳의 산물이다. 침묵이 문자화되면서 ‘나’ 그리고 분석적인 우리의 새로운 고독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는 소통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글월 속의 한 줄이다. 낱말 앞에 오는 침묵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어떤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의 혼란한 잡음 속 메시지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글월 이전 구술 시대의 우리, 양심 속에서 이어온 민속적 우리는 현실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민속적 우리가 분석한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 침묵의 역사가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182쪽)

* 책속으로 추가 *

이제 정말로 독자는 생빅토르의 위그가 1128년에 말했던 그대로 말할 수 있다. “Trimodium est lectionis genus: docentis, discentis vel per se inspicientis.”(내가 네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네가 내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에게 명상적으로 읽어줄 수 있다.) 이제 교사가 하는 활동으로서의 읽기, 다시 말해 소리를 내어 읽기와 듣는 활동으로서의 읽기는 제3의 소리 없는 유형의 읽기로 보완된다. 그것은 곧 책을 명상하며 읽는 것이다. _83쪽

번역자는 경계 자체를 만들고 그 너머로 건너가 노획물을 품고 이리로 건너온다. 그는 야만스러운 지껄임이 오가는 저 야생지대를 ‘저편’ 강기슭으로 바꾸어놓는 뱃사공과 같다. 번역자란 구술문화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세계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재판관 집무실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드라고만’ 같은 역관도, 두 글월이 서로 일치하는지를 잘 아는 독일의 ‘돌메체르’ 같은 해석자도, 같은 내용을 동시에 말하는 국제연합의 ‘동시통역사’도 없다. 이들 모두는 글월의 직공들이다. (…) 오늘날 번역은 한 글월을 다른 글월로 바꾸는 것을 나타낸다. 그 이면에는 글월 속에는 내용물이 담겨 있어ㅡ어휘, 문법, 발음, 문맥 등 나름의 특색을 지닌ㅡ하나의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그 내용물을 옮겨 부을 수 있다는 관념이 놓여 있다. _86~87쪽

라틴어에 대한 알퀴누스의 생각은 제국 전체에 걸쳐 하나의 발음법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발음법은 만민(겐테스gentes)에게 쓸모가 있어야 할 라틴어 글의 기능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었다. _98쪽

토착 문법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이전에ㅡ다시 말해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ㅡ링구아나 방언이나 아블라(말)는 칸칸이 구분된 서랍장의 서랍이라기보다는 무지개 속의 색깔에 더 가까웠다. _100쪽

언어의 역사에서 또하나의 이정표에 해당하는 사건은 1492년 8월 18일에 일어났다. 콜럼버스가 돛을 올린 지 겨우 보름이 지난 이날, 엘리오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라는 이름의 스페인 사람이 『카스티야어 문법서』를 펴냈다. 근대 유럽 언어 중 최초인 이 문법서는 하나의 토착 언어를 일련의 문법 규칙으로 격하시키려 한 책이다. _103쪽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네브리하는 스페인의 신민이 쓰는 언어를 표준화할 방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고안해냈다. _109쪽

‘자기’는 낱말과 기억, 생각과 역사, 거짓말과 서술 등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문자적 구성개념이다. 구술 시대에 구전 서사시와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서술과 자기는 서로 떼어놓기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자기의 일부처럼 자아낸다. 20세기의 시민은 갖가지 과학의 눈을 통해 자기를 글월이 켜켜이 쌓인 케이크처럼 바라본다. 18세기 이후로 국가는 문자의 신문 대상이 된 자기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_113쪽

『헨리 애덤스의 교육』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실패한 애덤스와 또다른 애덤스 간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애덤스는 문학적으로 별난 태도를 취한다. 『헨리 애덤스의 교육』은 헨리 애덤스가 들려주는 헨리 애덤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제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두 명의 애덤스를 경험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실제 애덤스인 옛 애덤스와, 나이가 든 작가인 새 애덤스이다. 그런데 애덤스가 둘인 것보다 더 희한한 것은, 기억이나 회상을 빌려 문학적으로 창조된 젊은 애덤스가 나름의 생명을 얻어 새 애덤스를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_122쪽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는 방식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은 지면을 보며 소리 없이 읽지 않으면 의미를 잃는다.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허클베리의 무지한 산문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자능력에 결박당한다. 트웨인이 의도한 유머를 모조리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허클베리의 문장을 보아야 하며 귀로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허클베리의 ‘sivilization’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실수의 아이러니를 놓친다. 트웨인이 허클베리를 아둔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면, 한편으로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_152쪽

19세기 사람 누구도 우리가 문자에 단단히 매달려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라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사람들은 지금 컴퓨터 문자문화를 추구하느라 기계의 힘에 예속되고 있다. 우리가 트웨인만큼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_157쪽

새말Newspeak[『1984』에서 나오는 가상의 언어]과 꽥꽥일률uniquack은 이란성 쌍둥이다. 컴퓨터가 아직은 신기한 물건에 지나지 않고 또 유니백UNIVAC이 유일하게 구입 가능한 컴퓨터 상표였던 1950년대에, 제임스 레스턴이 사설의 여담으로 ‘꽥꽥일률’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우리 두 저자는 일정한 형태가 없는 아메바 낱말을 가리키는 말로 꽥꽥일률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이런 낱말은 ‘특정 활동과 한데 묶여서 의미를 띠는’ 것도 아니고 ‘특정 형식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_162쪽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체계 내 두 요소 간의 정보교환으로 격하시키는 것ㅡ오늘날 우리가 ‘체계이론’이라 부르는 것ㅡ이것을 오웰은 ‘집단 유아론唯我論’이라 불렀다. _172쪽

탄탄하고 좋은 낱말을 일상에서 말할 때 이처럼 전문어의 방식으로 말하면 아메바 낱말이 줄줄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낱말은 수학자의 ‘E’처럼 어떤 의미도 띠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부산물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새말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 언어에 대한 태도가 조장된다. 전문용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이런 폐기물은 공해와 비슷하다. 생산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만들어진 부산물이 우리가 보고 만지고 숨쉬고 먹는 거의 모든 것 속에 침투해 들어가 변형과 퇴화를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문용어의 폐기물 역시 일상 언어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전문용어의 폐기물은 대부분 일상 대화에서 그저 혼선만 만들어낼 뿐으로, 경제성장 때문에 세상을 뒤덮는 회색 시멘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폐기물 중 많은 수는 아메바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불길한 의미를 가득 담는 한편 원래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채 더운 공기를 타고 날아올라 퍼질 수 있다.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신중한 사람은 그런 낱말에 대해 종종 어쩔 수 없이 사용 중지를 선언하게 된다. _175~176쪽

낱말과 마찬가지로 침묵 역시 알파벳의 산물이다. 낱말과 낱말 사이의 공백, 소리 없이 글월을 곰곰 생각하는 행위, 명상의 침묵 등은 모두 알파벳식 침묵의 갖가지 형태다. 우리는 침묵할 때도 문자의 인간이어서, 알파벳 영역 안에 있는 역사의 섬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대부분 낱말이 생겨나기 이전의 침묵에 대해 기껏해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대다수는 그 반대의 길로 나아가, 침묵을 뭔가 기계적인 것으로, 삑과 삑 사이의 공백으로 바꾸었다. _179쪽

침묵이 문자화되면서 ‘나’ 그리고 분석적인 우리의 새로운 고독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는 소통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글월 속의 한 줄이다. 낱말 앞에 오는 침묵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어떤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의 혼란한 잡음 속 메시지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글월 이전 구술 시대의 우리, 양심 속에서 이어온 ‘민속적’ 우리는 현실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민속적 우리가 분석적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 침묵의 역사가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_182쪽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_188쪽

책속으로

중세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경로를 따라 걸었다. 하나는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빅토르의 위그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경로이다. 다른 하나는 제프리 초서와 그가 지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너무나 거침없이 말하는 수다쟁이로 등장하는 배스의 아내로부터 마크 트웨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허클베리 핀으로 이르는 경로로, 이들의 말은 묵상이 불가능하다. _14~15쪽

문자문화의 너른 땅을 굳게 딛고 서면 인식론적으로 우리를 단절시키고 있는 깊은 구렁 두 개를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를 구술문화의 영역과 단절시키고 있는 구렁이다. 다른 하나의 구렁은 스모그처럼 스멀스멀 다가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문자를 정보의 조각과 같다고 봄으로써 읽기와 쓰기를 정보처리라는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_15~16쪽

역사학자의 집은 글이라는 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섬의 해변을 벗어나면 기억은 낱말이 되지 않는다. 낱말이 남겨지지 않은 곳에서 역사가는 재구성을 위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낱말이 없으면 유물은 침묵한다. _20쪽

서기전 4세기 때부터 사람들은 기억을 ‘열고 뒤지고 활용할 수 있는 저장고’로 이해했다. 철학자는 이 저장고가 어디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심장에, 뇌에, 공동체에, 또는 어쩌면 하느님 안에 있다고들 했지만, 이런 모든 논의에서 기억은 하나의 궤나 밀랍판 또는 책의 형태를 유지했다. 이 관념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밀먼 패리는 거의 아인슈타인에 가깝다. _35쪽

책 안에 있는 ‘글월’이라는 관념은 지면 위에 있는 가시적 요소들이 커다란 변화를 거치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었다. ‘글월’의 출현은 지면 위에 있는 글줄과 색의 배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현대의 문맹자, 즉 『켈스의 서』에 사용된 인슐라 글꼴을 해독하지 못하거나 라틴어를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알 수 있다. 구텐베르크 이전 800년 동안 필사본의 지면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면 서양에서 마음이 생겨난 단계를 알 수 있다. _59쪽

글자가 사회를 바꾼 두번째 방식은 글자 자체의 상징성이 문화의 이면으로 파고들어 글로 적힌 말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훨씬 덜 이루어졌으며 논하기도 훨씬 더 어렵다. _60쪽

중세기에는 맹세뿐 아니라 이전에 구술의 지배를 받던 일상생활의 폭넓은 영역까지도 새로운 종류의 형식적, 법적 문자문화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 시기에 인구 중 많은 사람이 사물을 소유하거나 권리를 행사하기 이전에 그것을 묘사해 양피지에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뢰가 말로 하는 약속에서 인장이 찍힌 문서로 옮겨간 것이다. _65쪽

수도원 필사실에서 책 사본을 만드는 것과 대법관청에서 양도증서 사본을 만드는 것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책의 원본은 수도원에 남아 있었던 반면, 양도증서의 원본은 대법관청을 벗어났던 것이다. 대법관은 남아 있는 사본이 이덴iden, 그러니까 원본과 동일identical하게 할 책임이 있었다. _70쪽

생명의 책이 그리스도교의 설교에서 중요해진 저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펜을 쥐고 양피지에 문자를 그려넣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베르나르의 필사실 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2세기 초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이던 베르나르는 자신의 손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키케로처럼 수도원장은 필경사를 두고 또박또박 명확히 들리도록 말하며 받아적게 했다. _75쪽

12세기를 거치는 동안 문자로 적힌 글월은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시각적으로 고정됐다. 시각적으로 고정된 글월에서 특정 요소는 돌출되게 했다. _81쪽

이제 세계는 묘사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놓여 있다. 책은 이제 임의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독자는 색인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든 마음대로 그곳을 찾아갈 수 있다. 글로 적힌 내용을 독자는 눈으로 보며, 이때의 시각화 과정을 삽화가 도와준다. 독자의 전거는 스승이 아니라 저자로 인식된다. ‘그 자신이 말했다ipse dixit’는 이제 ‘그 자신이 썼다ipse scripsit’로 바뀌었다. (…) 13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파리의 학생들은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에서 필사본을 빌려 수업시간에 스승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_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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