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정혜윤의 새벽 3시 책읽기
얼마 전 마음이 아주 깨끗한 친구가 회사생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친구는 회사에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천성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하거나 대충 사는 걸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운영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싫어도 따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직장인을 위한 소설이 한 권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날을 위한 우산>이란 책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구두 테스터다. 소설의 주인공은 내 친구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동의하세요?'라고 묻는 것은 오로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관은 '투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울해진다'이다. 그러나 이 인생관은 그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투쟁하면 일거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도 상사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을 한다. 그는 '왜 나는 나 혼자만 감동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만 하고 사람들이 당장 돈을 지불해서 사고 싶어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할까? 나는 모자란 놈이야'라고 생각한다. 그가 벗어나고 싶은 것은 지옥의 형벌이 아니라 하루의 지루함과 기이함이다.
그는 장난처럼 자신은 기억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연구소는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이고 자신은 단지 그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그 연구소는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 사람에게 그는 "텔레비전과 휴가, 마트, 아우토반을 벗어나 직접 체험하는 일을 돕지요"라고 말한다. 기억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의 친구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꿈, 이를테면 사진작가나 연극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초라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은 뭐가 되고 싶었나, 뭐가 갖고 싶었나가 아니다. 그것은 작은 신발 앞에 쌓이던 나뭇잎의 느낌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가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레이저쇼가 펼쳐지는 화려한 축제가 광장에서 열린다. 사람들은 인위적인 삶을 실제 삶으로 착각하는지 열심히 즐긴다.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들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없다. 그때 광장 맞은편 임대아파트 베란다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담요로 동굴을 만들고 방석이나 쿠션 같은 물건들을 옮겨 넣는다. 그다음에 소년은 그 안에 들어간다. 가끔씩 고개를 내밀어 축제가 열리는 광장을 바라본다. 그는 그때 4층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길이 천사의 눈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축제에 가면 우린 재미있게 놀든지 아니면 재미있게 노는 척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참을 만하다고 여기면서.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소년의 동굴처럼 내가 숨을 쉬면서 세상을 관찰할 만한 곳이 있느냐, 깊게 더 깊게 숨쉴 만한 곳이 이 도시에 있느냐'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장소일 수도 있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일 수도 있다. 너는 나를 숨쉬게 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다. 그런 사물·장소·관계야말로 변할 것 같지 않은 이 세상에 난 틈새들이다. 그 작은 공간에서 세상을 열심히 관찰하면서 다른 삶을 꿈꿀 수만 있다면, 다른 인간과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 천사의 눈길을 주고받을 것이고 삶은 점점 더 숨쉴 만해질 것이다.
정혜윤〈CBS〉피디
공식 SNS[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서비스 약관/정책 I 권리침해신고 I 책 고객센터 I 책 서비스 이용 문의
Copyright (c) Daum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사 또는 글쓴이에 있으며 Daum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