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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16세기말, 첫 대면한 조선인과 이방인은 서로를 어떻게 느꼈을까

경향신문 | 2008.07.18 18:03
ㆍ그 낯설고 기괴한 만남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박천홍 | 현실문화

16세기 말을 기점으로 ‘금단의 땅’ 조선의 바다에 정체불명의 배들이 나타났다. 배는 집채만큼 거대하고 돛대는 하늘을 찔렀다. 배에는 낯선 사람들이 파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붉거나 하얗고 코는 높다랗다. 살결은 희고 온통 짐승 같은 털로 덮여 있었다.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의 배들은 조선인들의 넋을 빼놓았다. 조선 정부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상한 모양의 배’라며 애써 외면하려 한 이양선(異樣船)이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는 이 이양선을 매개로 이뤄진 조선과 서양의 낯선 만남을 세밀하게 복원해낸 책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6세기 말부터 1860년대 초까지 서양과의 접촉 과정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재단법인 아단문고 학예실장으로 있는 저자는 조선을 찾았던 서양인들이 남긴 보고서·여행기·편지와 조선 측의 관찬(官撰) 사서나 개인 문집 등 동·서양의 방대한 자료들을 비교·대조하면서 조선이 서양이라는 타자를 만나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냈다. 이 같은 작업의 이유는 책머리에 인용된 글에서 드러난다. “한 사회의 정수와 그 심리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회가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어디에 긋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루스 멜린코프)

조선은 초기만 해도 서양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16세기부터 사태가 달라졌다. ‘대항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서양인들이 조선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관찬 사서에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이 등장한 것은 16세기 말. 국적 불명의 서양인 ‘마리이(馬里伊)’ 등이 표류해왔다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15년(1582년) 1월자 기록이다. 이후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배들이 조선 바다에 연이어 출몰했다. 조선인으로 생애를 마친 벨테브레와 ‘하멜 표류기’의 하멜은 그 일부일 뿐이다.

서양의 선박들은 처음에는 우연히 표류해 오거나 식량 등을 찾아 잠시 상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점차 탐험과 측량, 통상 요구, 기독교 선교의 자유 확보 등을 목표로 했다. 이 같은 이양선의 요구에 조선 정부는 “상국(上國)인 대청제국의 명령과 승인 없이는 감히 외교 관례를 맺을 수 없다”는 봉건적 정치논리를 내세우면서 거절했다.

책에는 한반도 해안에서 처음 대면한 조선인과 서양인의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과, 조선인의 눈에 비친 이방인을 차례로 보여주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직경이 거의 3피트(약 90㎝)나 되는 모자를 쓰고 있는 조선인”을 묘사하고, 조선 측 기록에는 “코가 높고 수염이 없으며 눈동자는 파란” 이방인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비록 편견과 곡해로 물들어 있긴 했어도 이방인들은 ‘내부의 타자들’이던 변방 민중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밀도있게 그려냈다. 그들의 눈에 조선 관리들은 오만하고 경직된 반면 민중들은 쾌활하고 친절했다. 거리낌 없이 담뱃대를 건네고 포도주를 마시고 ‘호타(좋다)!’라고 소리쳤다. 이방인들은 또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의 허구를 냉정하게 간파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게랭 제독은 1856년 “이렇게 분열되고 이렇게 무력한 나라, 관리들이 군함 한 척 앞에서 떨거나 달아날 줄밖에 모르는 나라는 처음으로 이 나라를 점령하려고 생각하는 유럽 열강의 야심에 희생될 것이 확실하다”고 적었다.

책은 조선과 서양의 만남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양선은 더 큰 상징성을 지녔다. 바로 되돌릴 수 없는 ‘근대’의 격랑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존자대(自尊自大)하던 조선 왕조에게 그것은 악령의 출현이자 몰락의 전주곡이었다”고 지적한다.

1860년대 중반, 조선은 ‘이양선의 시대’를 지나 ‘양요(洋擾)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양선이 잠시 왔다가 떠났던 조수 같았다면, 국가간 무력 충돌로 피가 얼룩진 양요의 시대는 근대 전야의 태풍”이었다. 신기술과 신무기로 무장한 서양의 선박들이 대거 출몰한 19세기 중반 조선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한줌의 벌열가문들이 국정을 쥐락펴락했고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기만 했다. 결국 조선은 ‘꼬마 서양’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저자는 근대의 격랑 앞에서 조선의 운명을 가른 요인을 탐구한다. 조선의 집권층은 중화주의 체제에 안주하려 했다. “자신을 중국의 2류 국가쯤으로 자처하면서 격동하는 세계 현실에 눈을 감으려 했다”는 것이다. 또 천주교 전파에 대한 두려움은 이방인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거둬 들였다. 서학·서교·서양을 사학·이단과 동일시하는 등 국가의 좌표를 잘못 설정한 게 더욱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실패와 비극으로 점철된 근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역동적이고 중층적인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갈림길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는 게 민중적 감수성의 세계다. 그들은 서양인을 만났을 때 본능적인 공포심을 표현했지만 곧 이방인들에게 친절해졌고 호기심을 느꼈고 때로는 동정을 표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내주었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춰진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그랬을 때 “타자는 제거해야 할 ‘악령’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매듭짓는다.

준비 과정 및 집필에만 4년이 걸린 역작이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내용을 솜씨있게 엮어낸 저자의 ‘공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다만 시대와 장소를 바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만큼 지긋하게 읽어나가는 독자의 ‘공력’ 또한 필요한 책이다. 3만2000원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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