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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낡고 더러운 방을 보고 내가 꿈꾸던 집이라던 일리치의 반개발과 삶

경향신문 | 2013.05.27 15:33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이반 일리치 지음 | 권루시안 옮김 | 느린걸음 | 400쪽 | 2만8000원

교육사상가 이반 일리치(1926~2002)와 함께 '개발'을 비판하는 활동을 해왔던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며 이런 일화를 전한다. 1980년대 도쿄 유엔대학교 초빙교수로 부임한 일리치는 러미스에게 몇개월간 묵을 수 있는 싸고 낡은 집을 부탁했다.

대학 측의 호텔 숙소 제공을 거절한 뒤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철거 예정지의 지저분한 아파트의 허름한 방을 보여주자, 일리치는 "딱 내가 꿈꾸던 집"이라며 좋아했다. 일리치가 이 낡고 냄새나는 거처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1978년 11월 인도 와르다 세바그람에서 한 연설에서 알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오두막보다 더 큰 곳을 원하는 이는 몸과 마음과 생활 방식이 초라한 사람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일리치는 평생을 망명자처럼 여러 곳을 떠돌며 살다 죽었는데, 죽기 전 20년 동안 얼굴 한쪽에 난 혹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는 병원에서 진단도, 치료도 받지 않으며 "나는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뿐"이라며 고통을 감수했다.

1988년 3월 '미국동부경제학회 협의회'에서는 이렇게도 말했다. "각종 치료 요법 없이 고통을 겪어내기, 의료의 감시하에 이루어지는 살해보다 '죽는다'는 자동사로 표현되는 행동을 택하기 등의 재발견을 일부러 축복과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경제학의 가려진 삶의 축복'이란 제목의 연설에서 그가 사례로 든 축복과 은총에는 "수송 수단보다 발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 공급주택에 대한 소유권을 차지하기보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집에서 살아가기, 발코니에 토마토 심기,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만나기"도 들어 있다.

책은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일리치의 연설문을 묶은 것이다. 일리치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리치 사상의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책이다. 경제, 교육, 평화, 여성, 컴퓨터, 물리학, 생명공학 등 다방면에 걸친 일리치 사상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일리치는 당대의 상식, 진실, 진리라 불리는 거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근대화나 경제성장을 옹호하는 책이 쏟아져나올 때 유일하게 경제성장과 개발 논리에 담긴 폭력의 문제를 성찰했다. 일리치가 보기에 사람들과 사회는 '경제화'되어 버렸다. 할머니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활동도 여러 방법으로 경제 기여도를 측정할 수 있는 '가사 노동'으로 재정의됐다. 할머니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되는 하나의 '가치'로 해석한다. '미진단자' '미보험자' '미치료자'같이 '필요'를 사용해 인간의 조건을 정리하는 통계학 용어는 인간을 곤궁에 빠진 동물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안데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문화권과 비교될 때 가난한 사람이 된다. '미개발' '저개발'이란 용어로 '개발'을 강조하는 세력·담론이 정작 '가난'을 개발한 것이다. 미래에는 우주여행을 못가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 취급 받을지 모른다. 일리치는 "문화를 경제학으로, 선을 가치로 탈바꿈하면 결국에는 개인의 자아가 뿌리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나타난다"며 인간을 궁핍한 존재로 인식하는 전통과 단절된 것으로 파악한다. 일리치는 개발과 물질을 강조하는 '가난의 근대화', '근원적 독점'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일리치는 시대를 앞선 성찰로 진보주의자들에게 부담과 불편함을 안겨준 사상가였다. '복지'와 '질 좋은 성장'에 담긴 폭력을 거론하며 "모든 성장 속에 함축돼 있는 자급에 대한 폭력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을 근본적 평화연구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는다"고 했다.

일리치가 강조한 것은 정주(定住)다. 과거, 인간은 대지에 뿌리 박고 정주하던 거주자였지만, 이제 생산된 건물에서 피난하면서 입주자법이라든가 신용수여자법의 보호를 받는 공동주택 소비자로 정식 등록된 입주자"가 됐다.

일리치는 "정주할 자유를 주장하는 상황에 따라 침입자로, 불법 점유자로, 무정부주의자로, 골칫거리로 낙인찍힐 것"이라고도 했다. 정주는 환경 문제와 이어져 있다. 일리치는 환경을 자원으로 보는 견해와 달리 '공용'으로 본다. 이 말은 중세의 영어 낱말이다. 일리치는 "공용에 울타리를 치자 새로운 생태학적 질서가 시작된다. 농민이 행사하던 초지 지배권이 물리적으로 영주에게 넘어간 게 다가 아니다"라며 "사회가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에 철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책에 '일리치를 회상하며'란 제목의 추천사를 쓴 러미스는 "1970~80년대 한동안 일리치 열풍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일리치를 읽지 않는 듯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일리치는 '녹색평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회자가 되었지만, 지식사회나 시민사회 일각의 유행도 지난 듯하다. 번역된 책들 중 일부는 절판된 상태다. 1992년에 출간된 책은 지금 한국에 대입해 읽어도 될 정도로 시사하는 게 많다.

미국과 서구의 '근대'와 '개발주의'를 아무 깔때기 없이 흡수하고 추종하다 파생된 한국의 여러 문제의 근원과 '급진적' 처방과 대안을 읽어낼 수 있다.

<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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