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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보고 · 콘돔배급 '日군부 위안소운영' 생생 증언

헤럴드경제 | 2013.08.16 11:29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 조선인
43년부터 2년간 생생한 기록
병참사령부에 영업일보 제출
위생검사·방공교육 수시로 받아
안병직 교수, 발굴 자료 공개

"무라야마 씨가 경영하는 위안소 이치후지루가 병참 관리로 되어 무라야마 씨와 아라이 씨는 병참사령부에 갔다 왔다."(1943년 7월 20일)

"인센의 위안소 2곳이 병참 관리로 넘어간 뒤, 위안부 검미도 병참의 군의가 하기로 되어 일요일마다 김천관에서 수검하게 되었다."(1943년 7월 26일)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사실을 담은 첫 물적 기록인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 조선인 박 씨의 일기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안병직 교수가 발굴해 해제를 붙인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 펴냄)는 박 씨가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로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개인 일기로, 특히 제4위안단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제4위안단은 일본이 1942년 5월 초 의뢰인을 경성에 파견, 군 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위안소 업자에게 모집을 의뢰해 이뤄졌다.

1943년 1월 1일부터 1944년 12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이 일기는 위안소 경영이나 위안부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아닌 생활일기이지만 위안소 상황에 대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등장해 전시 위안소의 성격과 운영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필자가 처남 등과 버마 아캬브시에서 위안소를 경영할 1943년 연초에는 부대에 위안부 수입보고서를 제출하긴 해도 군 소속으로 직접 관리를 받진 않았다. 그러다 43년 중반께부터 병참 관리로 바뀌면서 체계가 바뀐다. 병참사령부에 영업일보를 제출하고 필요한 콘돔 등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위생검사와 방공교육도 수시로 받았다.

일기에는 버마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생활을 하려고 나간 이를 병참이 다시 위안부로 불러들이도록 명령했다는 얘기, 임신 7개월의 위안부가 유산한 얘기 등이 담담하게 실려 있다. 필자는 위안부조합회의에 참석해 조합비로 경영자 30엔, 위안부 한 사람당 2엔, 합 62엔을 지급했다고 썼다. 위안부 15명을 데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손님은 점점 줄어 수입이 갈수록 줄었다. 필자는 관리인으로 있던 위안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자 싱가포르로 이주하기로 한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군 위안소' 해제를 통해 "이번의 일기 자료가 밝혀주는 조선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이 전시 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위안부들은 항상 추업부(醜業婦)로 천시됐다. 군 위안부들이 놓인 위와 같은 처지를 '성적노예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고 해제를 붙였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군용열차를 타고 병참 숙사를 전전하며 이름 모를 강들을 달려 태국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뒤 필자는 택시부의 사무를 맡아 하다가 다시 싱가포르 키쿠수이 클럽에서 쵸우바 일을 다시 시작한다. 타국에서 남녀가 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농촌생활을 그리워하거나 음력 십오야 만월을 보고 언제 고향의 하늘에서 달을 볼 수 있을까 감상에 젖는가 하면, 방향 없는 삶에 대한 막막함을 드러낸 대목도 있다.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전투영화로 알려진 '망루의 결사대', 육군 장교의 미망인을 향한 헌신을 다룬 군영화 '무호우마츠의 일생' 등의 영화 관람, 흥남 복권 8등(50엔)에 당첨된 이야기 등 여가생활도 엿볼 수 있다.

식민지의 지식인그룹에 말단으로나마 있던 필자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은 당시 조선 지식인의 풍경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1943년 벽두에 쓴 일기에서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며 동쪽을 향해 절한다. 또 8월 1일 버마 독립선언일에는 "일본-버마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영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금후 영원히 우리나라를 맹주로 버마국의 융성함을 축하한다"고 썼다.

이 외에 필리핀의 독립과 인도 가정부 수립, 신생 말레이 2주년 기념일 등 당시 격변기 동남아 정세, 전황에 대한 기록도 짧은 일기에 간간이 등장한다.

박 씨의 일기는 기록의 힘을 역시 보여준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평균 다섯 줄 정도 써내려간 반복적인 일상의 기록이지만 그 반복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고 깨지는지 전체적인 흐름에서 읽을 수 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다만 1942년의 일기가 분실돼 조선에서 위안부를 어떻게 모집하고 버마에 배치했는지 알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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