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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시인의 손을 녹였다

한국일보 | 2009.05.09 02:58

김지하씨 '못난 시들' 출간
"촛불 이후 난 새로 태어났다. 아! 축복이다. 이런 날도 있긴 있구나"
"순수성 잃은 촛불은 숯불일 뿐" 폭력시위·극우선동 모두 비판

'촛불 이후// 난 새로 태어났다// 쓰기 시작했고/ 끝없이/ 쓰고 또 썼다… 글도 이젠 순조롭다/ 아 축복이다/ 이런 날도 있긴 있구나'('못난 시 921123'에서)

2008년 5월, 고희를 바라보는 김지하(68) 시인은 서울시청과 청계광장 앞을 떠나지 못했다. 중학생, 초등학생, 유모차 부대의 손에 손에 쥐어진 촛불들. "조직도 없고, 명령도 없고, 지도자도 없는데, 폭력 없이 자기들끼리 질서를 잘 유지하더라구."

촛불이 시인의 손을 풀리게 한 것 같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담은 <비단길> 이후 김씨가 3년 만에 출간한 시집 <못난 시들>(이룸 발행)에는 촛불 대열의 한가운데서 일렁였던 시인의 마음의 파고가 강렬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30년 전 강고한 철권통치에 펜 하나로 저항했던 그에게, 십대 소녀의 가녀린 손에 쥐어진 촛불은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그는 촛불에서 약자들이 임금 노릇 한다는 동학의 '기위친정(己位親政)'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 세상 맨 꼬래비/ 애갱치(20세 이하의 젊은이)들과 여편네들과/ 쓸쓸한 외톨이들이 어느 날/ 문득 앞에 나서 직접 정치한다는/ 열흘씩/ 보름씩/ 야단법석 토론하는/ 옛, 옛, 옛 화백인지도 몰라'( '못난 시 9'에서)

시집 출간으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은 촛불의 함의를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촛불은 감기 걸린 손자를 위해 할머니가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다소곳한 마음"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순수성을 잃은 촛불은 '숯불'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했다. "고기를 구워먹는데 자기 고기 챙기려고 켜는 '숯불'은 결코 촛불이 아니에요."

새 시집과 함께 2005년부터 3년 동안 강연한 내용을 모두 4권으로 묶은 산문 시리즈 '소곤소곤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중 지난해의 글을 모은 책 <촛불, 횃불, 숯불>에는 '횃불'에 대한 내용도 설명돼있다. "횃불은 불현당(화적)이 높이 쳐들어 부자집을 덮치면서 허공에 지글지글 타오르던 것. 정권 탈취를 위한 혁명에의 몸부림으로 '촛불'과는 전혀 다르다"고 그는 썼다.

그는 평화적인 시위 때마다 복면을 쓰고 나타나 난장판으로 귀결시키는 파괴자들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까쇠르(Casseur)'에 빗대어 이들을 '까쇠'로 부르자고 덧붙였다. 폭력시위꾼뿐 아니라 인터넷의 '댓글 알바'나 '극우 선동꾼'도 그의의 눈에는 '까쇠'와 동류다.

시집의 서문에는 그 제목을 '못난 시들'이라고 붙인 사연이 살짝 소개돼 있다. 그 사연도 재미있다. "너희 세대도 내 시를 읽느냐?"는 아버지 김씨의 물음에 촛불세대인 두 아들은 "'오적(五賊)'이후의 시들은 어렵다. 아버지 좀 쉽고 재미있게 시 쓰세요!"라고 답했다. 김씨의 친구인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도 그에게 "슬프고 고급스러운 문법, 격조 같은 것 내던지라"고 가세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90여 편의 시에서는 김씨가 아들들과 친구의 말대로, 어깨 힘 빼고 어수룩하게 나이들어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대목을 여러 곳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컴맹에 '아날로그 꼰대'인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고 썼다. 지하철 경로석에 무임승차하는 일만으로도 '세상이 다 고맙다'고 썼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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