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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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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난 고등학교 동창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때 난 다른 고등학교 동창을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그냥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구가 서울에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님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서 난 마음을 고쳐먹고 친구가 도착하기 30분전에 신림사거리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역 안에서 친구가 오길 기다렸다. 만나려던 친구는 지하철이 밀리는지 터미널에서 내린지가 꽤 되었는데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붐벼 친구가 도착해도 휴대폰이 없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을 뱉어내던 지하철출구가 한 순간 한산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역시 2호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할 만큼 역이 한적해진 것이다. 붐비는 저녁시간에 이런 순간도 있구나 하고 희한하게 생각할 때쯤 출구 쪽으로 왠지 낯익은 얼굴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처음엔 낯이 많이 익은데 누구지 하고 생각했다. 3초가량 누굴까 생각한 순간 난 그 사람이 바로 내가 10년 넘게 만나고 싶어 했던 고등학교 동창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대에 간 그 친구에게 자격지심이 없지 않아 있어서 잠깐 망설였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그 친구가 보고 싶었던지라 난 내 옆을 한가로이 지나가는 그 녀석의 어깨를 툭 치고는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니 그 친구도 처음 3초가량은 내가 누군가 하고 생각하더니 이내 내 이름을 부르곤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는 나와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를 두고 살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그동안은 만나지지 못하다가 다른 동창을 만날 때 그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만약 평소대로 지하철 역 출구가 사람들도 북적였다면 난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 녀석은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에 섞였다면 좀처럼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친구와의 만남은 이렇게 지극히 우연이었지만 난 필연이라 믿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난 녀석을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달라지고 연락이 끊겨 좀처럼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었는데 이렇게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제일 복잡하다는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지금은 이 친구와 연락도 자주하고 가끔 만나 밥도 먹으며 다시금 우정을 쌓고 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다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9개의 단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픽션 같지가 않게 다가온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저자는 남자이면서도 여성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여자 입장이 되어 여성을 이해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시도도 좋았고 심리묘사도 꽤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총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부터 난 내가 주목한 것들 위주로 그 내용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에서 주인공인 나와 육촌동생이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육촌에게 ‘같은 택시를 두 번 탈 확률’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육촌은 주인공에게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때는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만난다. 인연에는 우연이 없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이에 대해 난 동의하는 바가 크다. 내가 직접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동창 녀석과 떨어져 지낸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난 늘 그 녀석과의 재회를 꿈꿨다. 훗날 그 친구가 내 인생에서 장량 혹은 순욱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늘 그 친구와 다시 만날 날을 꿈꿨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는 시기에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복잡하다는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말이다!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만나야 할 시기가 되니까 저절로 만나진 것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언제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느냐는 듯이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두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주인공이 남편과 책을 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남편은 주인공이 죽은 사진작가에 관한 책을 왜 써야 하느냐와 자신을 사랑하느냐 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의 질문을 무섭게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남자란 동물은 대단히 부적절한 순간에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고 치부해버린다. 난 이 부분에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남편이 자길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왜 무섭게 느껴졌냐는 것이다. 상황이 어찌되었건 간에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사랑하느냐고 묻지도 못하나? 물론 상황이 좀 부적절하기는 했지만 그게 무서울 정도의 질문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의 질문을 부정을 넘어 무섭게 받아들였는지 도통 이해가질 않는다. 오히려 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남자들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게 일반적인데 주인공은 그 점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자는 분명 남자인데 어떻게 여자의 심리를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대체로 여자의 심리를 잘 모른다. 오죽하면 남녀관계를‘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표현했겠는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자는 단편들 여러 곳에서 여성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평소에 여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글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여성의 심리를 파악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여자가 되어 여성의 속내를 이야기하고 남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부분은 내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주인공인 나와 시각장애인 도서관장이 안 팔리는 도서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다. 여기서 이인용 관장은 주인공에게 “선생의 소설은 어떻습니까? 팔리는 쪽입니까, 안 팔리는 쪽입니까? 혹시 베스트셀러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주인공은 안 팔리는 쪽에 속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를 듣고 이관장은 주인공에게 “그들은 선생의 소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안 팔리는 쪽이라면 말이죠.”라며 장애인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도서관장의 이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한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면서도 안타까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책은 대부분 눈이 보이는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즉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말이다. 책을 출판하는 분들이 과연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일정 부분을 할애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책을 낼 수 있을까? 아니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개의 출판사가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장애들까지 고려해 책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혹 책이 듣는 테이프와 함께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대개가 학습용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베스트셀러가 아닌 이상 안 팔리는 책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게 되는 것이다. 출판사의 상황이 여의치 않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다 같이 사는 세상에서 책을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책도 좀 발간하고 듣는 테이프도 같이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남자 혹은 여자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가끔 노골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민망하게도 하지만 이야기에 잘 녹아들었기 때문에 누가 보든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김연수 작가만의 독특한 필체와 사유를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인상적인 글귀
“미래를 바라봐온 십대, 현실과 싸웠던 이십대라면, 삼십대는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불가항력적인 우연의 연속이다.”
| 펌글 ㅋ | 초코칩 | 2009-11-05 |
| 잠깐이지만 너무 강한 만남, 인연 | kasha | 2009-11-05 |
| 김연수 작가만의 독특한 필체와 사유를 느끼게 하는 책 | 최고조조 | 2009-11-05 |
| 함께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성장 | 호의은행 | 2009-11-05 |
|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했던 허삼관과 그 가족의 가슴뭉클한 얘기 | sunny | 2009-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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