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희망을 ‘누란(楼蘭, Loulan)’처럼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2002년을 기억한다. 입시지옥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얻은 스무 살의 자유를 기억하고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의 아련한 감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붉은 물결.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던 그 뜨거웠던 군중을 기억한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홍위병같이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너도 나도 머리와 몸에 태극기를 두르고 짝짝짝~짝짝 박수를 쳐댔다. 독일전이 열리던 날에는 나도 그 군중 속에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만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보다 더욱 더 그 열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Be the Reds. 꿈은 이루어진다! 광장에 나와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 아니 대한민국 전체가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그때 그 군중 속에 한 남자도 서 있었다. 허무성. 나이 마흔의 중년 사내. 붉은 티를 입고 태극기를 휘감고 무리 속에서 환호하는 그들과 달리 허무성 그는 내내 고독하고 쓸쓸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붉은 팥죽이 펄펄 끓는 가마솥’처럼 들끓는 군중을 그는 연방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숭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휑한 눈이었다. 뜨겁게 끓어대는 붉은 물결. 그의 조부모와 어린 삼촌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한 사건, 피투성이가 된 그의 아버지, 대학시절 남산 기슭의 지하실로 끌려가 개처럼 묶여 받던 잔혹한 고문…… 시뻘건 피처럼 꿈틀거리는 그 색이 그에게 다시 핏빛 기억들을 떠오르게 했다. 트라우마. 십오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의 기억. 386 운동권의 막내 학번이었던 그는 달리는 버스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가 두 팔을 불끈 쥐고 연설할 만큼 용감한 청년이었으나, 그날 지하실에서의 그 짐승 같은 시간 이후로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군중들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오는 핏빛 기억들만은 아니다. 길가는 대중을 향해 힘 있게 외치던 자신의 연설을 회상했고, 최루탄 가스의 매운 연기 속에서도 어깨를 맞대고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를 외치던 군중들을 떠올렸다. 십오년 전 가두투쟁에서의 군중, 그리고 2002년 그 붉은 물결의 군중. 전자는 신념과 이념을 가진 개개인의 집합으로서 군중 전체가 ‘참여자’였고 ‘자기 운명의 창시자’였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똑같은 표정의 얼굴 수십만 개를 가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수십만의 촉수를 가진 거대한 해파리’. ‘지능이 낮고 영혼이 없는, 어리석은 생각의 집합’일 뿐이었다.
<누란>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다들 실패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독재에 맞서 열심히 싸운 386세대 덕에 대한민국에도 자유와 민주화가 온 듯 했지만, 자유를 찾은 이들은 이전 시절을 새까맣게 잊어버렸고 신자유주의의 망령에게 영혼을 바쳤다. 사고하길 거부하고 귀찮아하며, 책을 보는 대신 텔레비전을 숭배하고 포르노를 찬양했다.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겠다는 신자유주의 망령의 꼬드김에 너도나도 소비하지 못해 안달 났으며,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쓴 호소문이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고, 길에서 죽은 노숙자가 무관심 속에 며칠씩 방치되다 쥐에게 귀를 뜯겼다. 미군 장갑차에 깔린 여중생들의 비명소리도 시청과 광화문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함성소리에 묻혀 버렸다.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된 군중들 속에서 허무성도, 문정선도, 이종구도 옛 왕국 누란처럼 돼버렸다.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한때 크게 번창했으나 모든 것이 소멸되고 죽어 모래 속에 묻혀버린, 인광이 날고 흰 뼈들이 뒹구는 곳. 누란. 십오년 전 가두투쟁을 함께 한 그들을, 신자유주의에게 점령당한 군중은 기억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야말로 새로운 파시즘이다. 세계화란 이름으로, 자본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복종시킨다. 군중에게서 생각을 빼앗고 영혼을 갈취한다.
그리고 수구세력은 그런 우둔한 군중들을 이용해 다시 한 번 파콜리지(박정희주의)를 부활시키려 든다.
모든 관계를 끊고 과감하게 추락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 구조조정을 당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구조, 그 체제에서 탈퇴하는 것이 필요했다.
시민권 포기, 서울을 버리는 것,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 다시는 재기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느껴지지 않는 철저한 추락, 최종적인 실패자가 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이종구처럼 노숙자 생활을 경험하기로 했다. 이전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철저한 추락을 경험하지 않는 한, 새로운 변신은 불가능해 보였다.
깊은 절망과 체념, 무력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힌 허무성이 택한 방법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굴레를 벗어버리고 체제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처음엔 노숙자 생활로, 그리고 마침내는 지리산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조부모와 어린 삼촌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 폐가를 찾아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허무성이 아직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를 찾아내 말해주고 싶다. 2002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2009년의 군중은 많이 똑똑해졌다. 6월항쟁의 뜨거운 물결 속에서의 당신과 그 동지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10년간의 자유와 권리를 다시 빼앗기고 신자유주의의 망령에게 된통 당한 군중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당신들을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지난해의 그 뜨거운 촛불집회를 당신도 보지 않았는가. 그러니 아직 포기하지 말라. 체념하지 말라. 부디 우리와 함께 해 달라. 허무성을 붙잡고 그가 흘린 눈물처럼 뜨겁게 울면서 간절하게 부탁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현기영 선생이 말했다. “희망을 말하면서 낙관론을 펼치려면 나 같은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도 조금은 경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관론은 적어도 우리의 타격대상이 얼마나 완강한 철벽인가를 일깨워준다. 지피지기의 전략이 없는 싸움은 패하기 마련이 아닌가.” 물론이다. 철부지 어린애처럼 마냥 낙관적인 것 보다는 비관론이 더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본 그 희망……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작은 촛불들. 조금은 달라진 군중.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군중들.
스스로 비관주의자라 칭하는 선생께서도 부디 그 실낱같은 희망만큼은 믿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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