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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 월~금 연재RSS

도가니

  강인호의 차는 다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무진을 삼키고 있는 안개에 대해 전혀 실감하는 바가 없었다. 그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태어나 반도의 중심을 벗어난 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한때, 젊음이 가져다주는 가지가지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내던 시절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통해 무진의 안개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을 뿐이다. 그가 태어나기 10년도 더 전에 작가 김승옥은 무진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한 일이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이라는 지명과 안개라는 이미지와 김승옥의 짧은 소설은 그러나 그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그림자를 데리고 왔다. 아내가 무진,이라는 도시의 지명을 꺼냈을 때부터 기억은 안개의 바다 속에서 항구로 다가와 윤곽을 드러낸 배처럼 그에게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무진기행」 말이에요…… 나는 선생님이 처음 부임해서 그 소설을 소개해주었을 때 꼭 오늘이 올 줄 알았어요.”
  난데없이 부대로 면회를 와서 자고 가겠다고 우기던 명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이불 속에서 망설이던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가 물었다.
  “하인숙이라는 여자 말이에요. 주인공이 약속을 어기고 떠난 후 무진에 홀로 남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명희의 몸에서는 희미한 복숭아 냄새가 났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영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잠시 근무했던 여학교의 제자였다. 그리고 부대 앞으로 찾아온 그녀는 갓 스물의 나이를 숨기지 못하고 서투른 화장을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나 처음........ 아니에요.”
  오히려 떨고 있던 것은 그였다. 주저하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벗은 가슴에 대며 명희는 까르르 웃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어린아이의 서늘한 기운 같은 것이 서려 있었지만 그건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희를 보내고 부대 근처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낮술을 퍼먹고 다시 귀대했을 때 그는 날파리처럼 달려드는 간지러운 죄책감들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끔씩 찾아오는 명희와 나눈 살의에 가까운 정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총부리를 살아 있는 누군가에게 겨누었을 것이 틀림없다. 설사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제대할 무렵, 명희의 소식은 끊겼다.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가 그가 제대하기 몇달 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명희의 말이 떠올랐다.
  “하인숙이라는 여자 말이에요. 그 주인공이 약속을 어기고 떠난 후 무진에 홀로 남아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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