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은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이사는 이사였다. 제자리에 들어가 있으면 꼭 그렇지도 않은데 꺼내놓으면 남루한 것이 살림살이들이었다. 강인호는 무진에서 새로 구한 15평 주공아파트 부엌에서 그 살림살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냄비와 커피잔, 물컵, 그리고 작은 접시 몇 개뿐이었지만 그것들을 가지런히 찬장에 놓고 노트북까지 부엌에 딸린 식탁에 놓아두자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집을 떠나 새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나기도 했고, 대학시절 친구의 자취방으로 놀러온 듯 신선한 기분도 들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서유진이 서 있었다.
“정말 왔구나. 이런 곳에서 널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네…… 반갑다.”
서유진은 들고 온 샴푸며 세제 등의 선물꾸러미를 내려놓으며 강인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잠시 손을 잡고 웃었다. 서유진은 강인호의 대학 한해 선배였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에 동창으로부터 유진이 무진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소문 끝에 메일이 오가고 문자메시지가 오간 후 이 아파트도 서유진이 주선해 얻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기로는 오늘이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거의 십년 만의 재회였다. 그는 유진의 얼굴에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가녀린 단발머리 여학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신산辛酸에 담갔다 꺼내놓은 듯, 지금 그의 앞에 선 중년 문턱의 그녀의 얼굴에는 그런 빛은 사라지고 없는 듯했다.
“서 선배 이혼했어. 애 둘을 혼자 키우며 사나봐. 아이가 어디가 많이 아프다던데. 사는 것도 힘이 드나봐……”
유진의 소식을 전해준 동기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참 이상해. 예쁘고 똑똑하고 괜찮은 여자들은 꼭 이상한 놈 만나서 고생들을 해.”
한때 서유진을 두고 다다를 수 없는 연정에 훌쩍거렸던 동기는 술에 취해 그렇게 말했다.
“네 마누라가 그 대표선수다, 쨔샤!”
강인호는 그렇게 무마하고 말았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들려오는 유진의 소식은 동기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긴 했다. 잇따른 남편의 정치 입문 실패, 정상적이지 않은 아이의 출산, 그러므로 필연처럼 뒤따라오는 가난까지. 그녀가 어떻게 이 무진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 낯선 도시의 새 집에서 그녀와 마주 서게 되자 그녀의 섬세하고 반듯한 얼굴의 윤곽 속에서 새삼 젊은 그가 보았던 유진의 풋풋한 실루엣이 가만히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그녀의 존재로 인해 무진이 좀 친근해졌고 안개 속에서 그를 경직시켰던 긴장이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 때문에 걱정했는데 오느라 고생했지? 하지만 무진에서는 무엇보다 이 안개에 익숙해져야 해. 이제야 좀 걷힌다.”
유진은 어느새 창가에 가서 밖을 기웃거리더니 인호에게 말했다. 팔짱을 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강인호는 처음으로 유진이 참 작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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