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이.”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전쟁의 신관이 느긋한 어조로 불렀다.
아이거와 키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다 시피한 그녀의 얼굴은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
로이브의 말투는 평온했다. 다른 신관들과는 달리 들판에서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몹시 지쳐 보이는 군. 대단했어.”
그는 회의를 하는 다른 신관들을 내버려두고 키나와 아이거에게 다가왔다. 아이거의 시선이 그의 발치에 닿았다. 쇠로 징을 박은 가죽샌들을 신은 맨발은 온통 피와 살점으로 뒤범벅이다. 횃불 아래 드러난 그의 신관복 자락도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했다. 좁은 굴 안에 쌓여 있는 처참한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와 녹다 만 있는 괴물의 시체가 진흙탕처럼 뒤엉켜 바닥은 도살장보다 더했다. 좁은 굴 안이 온통 피와 살점으로 젖어 그가 걸을 때마다 쩌걱쩌걱 소리를 냈다.
“우리 악당 사형이 뭐라 했어?”
아이거는 시선을 돌렸다.
사지가 찢겨진 시체며, 형태만 겨우 남긴 괴물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다. 성한 자와 부상자들은 모두 제각각 횃불을 든 채 상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흐느끼며 울고 있는 이도 있었고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지옥이다. 새로운 지옥의 재현이다.
그는 지옥에 익숙했다. 이유도 없이 죽고 죽이는 상황에 분노할 여린 심장은 예전에 죽었다. 하지만 지옥이 끔찍하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키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다친 곳은 없나?”
횃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을 등에 지고 전쟁의 신관이 씨익 웃었다. 피로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하고 핏물이 떨어진다. 그는 과묵한 두 죽음의 사제 앞에 주저앉았다. 옷자락에 오물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괜찮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로이브가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이 앞장 서 주어야 겠어. 이들 중에 멀쩡한 것도 당신들뿐이고 망할 키메라나 언데드들이 덤비지 못하는 것도 당신들뿐이니까.”
“알겠습니다.”
아이거가 항의할 틈도 없이 키나가 대답하며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바로 뒤를 따라 갈게. 신력의 회복은 어느 정도지?”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실치 않으면 불안하거든.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신의 뜰>을 펼칠 수 있나?”
그의 질문에 키나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데스가움의 신어를 알고 있었군요.”
“몇 가지 밖에 몰라. 케엘스텐 파린타. <신의 뜰을 구현하라>. 케리에 킬. <신의 품으로 가라>. 그것 두 가지 뿐이지. 아아, 케비타 에리슬.<신께 영광을>. 그것뿐이야.”
피로 물든 신관복 자락 사이로 두툼한 가죽 갑옷이 보였다. 오래되어 색이 바라고 흠집으로 허옇게 일어난 낡은 갑옷이다. 그가 낀 가죽 건틀렛도 피와 살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신을 모시는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기세를 온몸에서 풍기고 있는 그의 두 눈에는 번들거리는 광기마저 서려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수축된다. 아이거는 그의 시선을 피해 오쿠거의 상태를 살폈다. 뜻밖에도 오쿠거는 졸고 있었다. 방금 전 끔찍한 상황을 겪은 것 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그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결국 두 명의 죽음의 사제가 앞서고 그 뒤를 전쟁의 신관 로이브와 로제스, 그 뒤를 성기사와 신관들이 따랐다. 일행의 수는 이제 100여 명 정도였다. 부상자를 돌려보내고 나니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 맨 뒤에는 치유의 성기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길이 외길인 터라 어두워도 움직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 앞으로 광장이 나오게 되오. 거기서부터 주의하시오.”
로제스가 뒤에서 충고했다. 그의 말투는 점점 더 정중해지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뒤에 있던 일행들 모두 키나를 대하는 태도가 정중해졌다.
두어 시간 동안 그들은 키메라나 망령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목 곳곳에 그 끔찍하던 괴물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키나가 아까 펼친 죽음의 기운이 이 굴 전체를 휩쓸었다는 증거였다. 이정도 광범위 신성마법은 대신관 이상, 혹은 교황만이 펼칠 수 있었다.
아이거는 키나의 앞으로 걷고 있었다. 키메라나 망령은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이 공격해 오면 그녀라도 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뭔가가 튀어 나오면 방패가 될 생각이었다.
문득 걷던 다리가 뻣뻣해졌다.
등줄기로 다시 한기가 흘렀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키나를 확인했다. 그녀의 무심한 표정을 보자 질주하던 불안이 가라앉았다. 앞쪽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악취에 머리가 아파온다. 좁은 동굴만으로 끔찍했다.
“케엘스텐 파린타.”
얼결에 신어를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키나의 작은 손이 다가와 그의 팔뚝을 건드렸다. 그 신호에 뒤로 물러서자, 그녀가 지팡이를 꺼내 허공을 휘휘 내저었다.
“까악, 까아아아.”
까마귀 우는 소리와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베일을 뒤집어 쓴 여인처럼 보이는 망령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튀어 나왔다가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자, 차가운 습기가 확 얼굴에 와 닿았다. 콧속으로 썩는 내와 더불어 음산한 습기가 스며든다.
로제스의 말대로 광장이 나왔다. 너무 넓어서 횃불 몇 개 가지고는 다 밝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일행들은 숨을 삼키며 긴장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키나의 몸을 한쪽 어깨로 가리며 아이거는 검을 뽑아 들고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아까처럼 검붉은 안개 같은 것이 또 나올지도 모른다.
긴장하는 그를 보고 뒤에 있던 로이브가 물었다.
“웬 검이야? 죽음의 사제는 살생을 못하는 거 아니었어?”
그 말에 그는 움찔했다.
살생금지. 산 것을 죽이지 못한다. 죽음의 사제는 살아 있는 것을 해할 수 없다. 심지어 죽을 지라도.
바로 그 때 끔찍한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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