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길이 점점 더 험해진다. 미지의 어둠은 온 몸을 짓누른다.
동굴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꾸불꾸불한데다 폭도 넓어졌다 좁아졌다 불규칙했다. 높이도 낮아졌다가 높아지기도 했다. 횃불이 비추는 동굴 벽면마다 썩어가는 정체불명의 살덩어리가 으스러진 채 붙어 있다. 발끝에 흩어지는 것은 세월을 못 이기고 변색된 인간의 뼈다.
지치고 다친 신관들은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어깨 위로 공포가 매달려 킬킬거렸다.
아이거는 그처럼 기세등등하던 신관들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지옥의 여신을 발견했다. 그 여신은 공포라는 감정을 먹고 광기와 눈물을 배설한다.
그와는 반대로 아이거의 마음은 가라앉았다. 지옥 속에서 지내온 그의 마음은 잔혹한 광경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새로운 주인의 명령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산 자를 죽이지 마라.
죽음의 사제가 가지는 단 하나의 절대명제.
눈앞이 깜깜했다.
그는 싸우고 죽이면서 살아 왔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는 죽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지킬 수 없는 단 하나의 규율이 바로 그것이었다. 산 것을 죽이면 안 된다니. 그는 굳은 얼굴로 바로 앞에서 걷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한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죽여도 괜찮았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죽어도 괜찮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스가움의 사도들이 가지는 단 하나의 계율. 심장이 얼어붙는다.
“쉽시다.”
로제스의 말에 걷던 이들이 일제히 섰다. 부상자를 뒤로 보낼 여력도 없었던 이들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두 발로 혼자 걸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치유의 신관들은 냉정한 얼굴로 치료 가능한 이들에게만 치료했다. 죽어가는 이들은 그저 내버려 둔다. 그에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기도하고 몸을 다스리기 위해 애를 쓸 뿐.
문득 로제스가 키나와 아이거를 불가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죽음의 사제여.”
키나와 아이거가 그를 보자, 전쟁의 신관은 거칠어진 음성으로 물었다.
“둘 중 한 사람은 일행의 뒤로 가는 게 어떻소?”
키나는 침묵했지만 아이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절대로 그녀의 곁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키메라들이 들끓는 곳이라 해도 산 자가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그녀로선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규율을 어기고라도 키나를 지킬 생각이었다. 상대를 죽일 수는 없다 해도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몸으로 키나를 지킬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뒤에서 누군가가 항의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나서지 않는다니 너무한다며 속삭이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잔잔한 물 위로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공격받지 않는 그들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퍼져나갔다.
“그만. 여기서 불평불만을 토하는 자는 아가리를 갈라 저 괴물들의 밥으로 던져 주겠다.”
낮고 거친 목소리가 위협을 담았다.
이를 드러낸 전쟁의 신관은 피로 얼룩진 검을 쥔 채 이죽거렸다.
“등신들아. 정신을 차려라. 죽음의 사제가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복종하라. 지휘관의 말에 불복종한다면 목을 잘라주겠다.”
오만방자한 데가 있었던 로제스였지만 이번의 폭언은 엄청났다.
“로제스!”
“어찌 그런 말을!”
여기저기서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로제스는 차가운 눈빛을 번들거리며 잘라 말했다.
“잊지 마라. 나는 지휘관이다. 지금 레 기사단의 데레스 경이 부상 중이니만큼 명령은 내가 내린다.”
“로제스님!”
불만이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싸그리 무시하고는 자신의 사제에게 턱짓했다. 입이 나온 로이브는 별 수 없다는 듯 검을 빼들고는 분노와 불만의 기색을 드러낸 신관들 사이로 걸어갔다.
“서, 설마!”
“설마 우릴 죽일 셈이오?”
로이브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눈치 챈 이들이 저마다 무기를 집자, 전쟁의 신관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전쟁과 광기의 사도들에게 덤벼들 똥배짱은 키우지 마시오. 상황이 심각할수록 의견을 모아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게 기본이 아뇨? 이 자리에서 우리보다 더 잘할 사람 있으면 나오라 그래.”
적나라한 말투에 기겁을 하는 신관들과 기사들을 내버려 두고 로이브는 시퍼렇게 빛나는 검날을 들어 보였다.
“이런 좁은 곳에서 자중지란은 개죽음의 지름길이오. 개죽음하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서 체력을 낭비하시오.”
투덜거리는 말조차 엄금하는 분위기였지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두 전쟁의 신관에게 대드는 자는 없었다. 데레스 경은 피로 젖은 왼팔을 붕대로 감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팔을 잃어 불구가 되었다.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치유의 신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의 신관과 치유의 신관은 기묘하게도 가장 성향이 비슷했다. 합리적이고 잔혹하면서 동시에 기묘하게도 헌신적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되돌아 나가긴 너무 들어왔고 계속 가면 희생이 너무 큽니다.”
잔잔한 음성으로 프라이스가 입을 열자, 시선이 일제히 로제스에게로 쏠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독선적인 전쟁의 신관은 팔짱을 끼고 키나를 돌아보았다.
“키나님, 앞으로 뭐가 더 있을 거 같소? 당신 힘으로 다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다들 주저 앉아 있는 가운데 홀로 서 있는 키나의 안색은 파리하고 창백했지만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앞으로는 더 이상 위협적인 언데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뭐? 그럼 이게 전부라고?”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 것도 잠시, 로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데드는 더 없을 거라면 이 앞은 탄탄대로라는 뜻이오?”
“비정상적인 흐름은 더 이상 없습니다.”
키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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