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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 월~금 연재RSS

싸우는 사람

오쿠거는 잠을 자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을 잃고 기절한 상태였다.

오쿠거에게 있어 완벽한 어둠으로 휩싸인 동굴은 끔찍한 장소였다. 더욱이 산 것도 아닌 괴물이 날뛰는 곳은 숲의 야수인 그에게 격렬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타고난 본능은 이  곳을 벗어나라 외쳤지만 그의 목에 매달린 대지의 여신은 침착하라 다독였다. 그러나 결국 오쿠거의 의식은 끊어졌다. 발광하여 날뛰는 본능을 억누른 결과다.

깊은 어둠 속에서 본능을 억누른 심연의 어둠 속에서 오쿠거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비로우신 대지의 여신이시여.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오쿠거를 건드렸다.

-나의 밀레노아시여, 제발, 제발 제 소원을 들어 주소서.

오쿠거는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녹색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계곡이 떠올랐다. 칼날로 자른 듯 날카로운 절벽에서 눈송이같은 포말을 일으키며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고 흰 날개를 자랑하는 새들이 날았다.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폭포와 계곡을 덮고 향기로운 꽃들이 나비와 벌을 불렀다. 오쿠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로 다가가 입을 댔다. 차가운 물속에서 손바닥만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허기지진 않았지만 코 앞에서 얼쩡거리는 물고기를 보자니 사냥욕이 인 오쿠거가 앞발을 넣어 물고기를 후려쳤다. 하지만 물만 잔뜩 뒤집어썼을 뿐 물고기는 유유히 달아나 버렸다. 오쿠거는 진저리를 치며 물방울을 털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몸을 털자, 절로 개운해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오쿠거는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네 발로 서 있었다. 굳건한 오른 발이 그대로 달콤한 흙을 디딘 채 서 있다. 그는 앞발을 들어 확인했다. 잃어버렸던 오른 발은 빛나는 발톱을 고스란히 지닌 채 생생하게 움직였다. 앞발만이 아니라 뒷발도 마찬가지였다. 기쁨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오쿠거는 펄쩍 뛰어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산등성이를 넘고 넝쿨과 기생목을 휘감은 거목도 뛰어 올랐다. 뒤로 튀어 올라 바위 위에 내려앉아도 숨이 차지 않았다. 사람이었다면 크게 웃었을 것이다.

오쿠거는 세 쌍의 귀를 흔들고 꼬리를 흔들며 흐뭇하게 다시 찾은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자상하신 밀레노아시여, 제 말을 들어주소서.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리자 오쿠거는 큼직한 바위 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훑어보았다.

하얀 나비가 하느작 움직이는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산백합이 흔들리는 수풀 속을 바라보며 오쿠거가 천천히 다가가자 길죽한 바위가 하나 보였다.

이끼가 뒤덮인 회색 바위는 인간처럼 생겼다. 무릎을 꿇고 앉은 인간의 형태를 가진 바위 위로 하얀 나비가 올라앉았다가 산백합의 향에 이끌려 사라진다. 오쿠거는 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소리는 바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밀레노아시여, 이 늙은이를 가엾게 여기사 도와주소서.

오쿠거는 바위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너무 가늘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다.

오쿠거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오로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던 모자란 인간사내 뿐이었다. 성년도 되지 못한 그 모자란 것을 갑자기 떠올린 오쿠거는 잠시 귀를 젖혔다. 그가 없으면 그 모자란 것은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텐데. 제 앞가림만 좀 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쿠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떠오른 인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오쿠거는 바위 앞에 주저앉았다.

하얀 산백합으로 둘러싸여 있는 바위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간이 바위가 된 것인지 바위가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인지 오쿠거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쩐지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밀레노아시여.

포근한 노란 빛이 문득 오쿠거의 앞발로 떨어져 내렸다. 오쿠거는 친근한 그 빛에 고개를 내밀었다. 포근한 빛은 오쿠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사그라진다.

-밀레노아시여.

바위가 뭐라 할 때마다 민들레 홀씨처럼 노란 빛이 작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오쿠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감상했다.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빛이다. 문득 오쿠거는 작달막한 대지의 신관을 떠올렸다. 그 신관에게서 나는 냄새도 기분이 좋았었다.

-밀레노아시여.

오쿠거는 슬그머니 앞발을 바위에 대어 보았다. 그다지 차가운 느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바위와 다른 것도 아니다.

-밀레노아시여, 오만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쿠거는 인간처럼 생긴 바위에서 흐르는 물방울을 보았다. 맑은 물방울은 툭툭 오쿠거의 앞발을 적셨다. 가슴이 저린 슬픔이 배어 나온다.

바위는 인간이었다. 많은 인간들이 존경하고 따랐던 대단한 인간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영리했으며 정의감에 불타는 남자였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어지럽고 추악했다. 신의 뜻을 받들고 있다는 신관들조차 추악하기 짝이 없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부도덕한 일들에 분노를 느낀 그는 인간의 의지로 기적을 일으키겠노라고 결심했다. 아내가 죽고 아들이 죽고 손자가 죽고 손자의 아들이 죽도록 인간은 살아남아 버텼다. 희귀한 약을 만들고 영생을 준다는 독액을 삼키고 험한 산악을 헤매고 수백 년 된 고서를 뒤지며 고심하고 고민했다. 어찌하여 인간은, 인간만은 이토록이나 사악한 것일까. 왜 인간에게 신은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흐를수록 그는 고통에 빠졌다. 죽지 않는 자신에게 절망했고 변하지 않는 인간들의 오만에 실망했다. 어느 날 그는 허름한 마을에 찾아들었다. 초라한 늙은이의 형상을 한 그를 보고 가난한 마을의 한 아이가 먹을 것을 주었다. 딱딱하고 곰팡이가 핀 빵. 그는 아이가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레노아시여.

그는 땅 위에 핀 꽃 한 송이를 보았다.

가난한 농부가 씨앗을 뿌려 추수하고 수탈당하면서도 견디는 삶을 보았다. 수백 년 된 나무가 베어진 그루터기 위에 솟아난 새싹을 보았다. 제 살을 베어 새끼에게 먹이는 늑대를 보았다. 바짝 마른 몸으로 먹을 것을 토해내 새끼에게 먹이는 새들을 보았다.

-밀레노아시여. 구해주소서.

노인이 된 그는 미소를 되찾았다. 그는 가난한 집 소년을 위해 글을 가르치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약초의 이름과 효능을 알려주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다. 세상에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내며 그는 수 백 년 만에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데.

-그 애를 구해주소서. 아이를 돌려주소서.

악취를 풍기는 검은 악마가 나타나 마을을 덮쳤다. 아이를 지키려는 어미를 죽이고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을 죽이고 아리따운 생명을 파괴했다. 욕심으로 불타는 악마가 노인에게 속삭였다.

-내게 힘을 주시오. 나 역시 인간의 의지가 죽음을 뛰어 넘는다고 믿소. 그 힘, 불사의 힘을 내게 주시오. 위대한 주법사여!

노인은 분노에 겨워 불타올랐다. 노인의 의지가 숨 죽였던 대지를 뒤흔들었다. 악마가 이끌던 괴물들이 노인의 의지에 함몰되어 짓이겨졌다. 거대한 의지가 악마의 몸을 내던지고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었다.

-네 놈이 가진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네 놈이 가진 것은 인간의 욕심! 네 놈이 가진 것은 인간의 더러운 욕심이다!

노인이 외치는 순간 악마의 몸이 산산이 찢겨 바닥에 흩어졌다.

악마는 사라졌지만 죽어버린 마을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의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그의 슬픔이 대지 위에 떨어지며 공명했다. 그의 의지는 슬픔에 겨워 속삭였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자. 이대로 굳어져 다시는 깨어나지 말자.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더러운 욕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인은 외로이 집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그의 연구실이었고 그의 선배와 후배들의 은신처였던 굴은 여전히 쓸쓸하고 음산했다. 지친 노인의 몸이 천천히 굳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피로와 절망이 노인의 몸을 돌로 바꾸어 대지와 동화했다. 마침내 노인의 의지는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어버린 마을 위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악마를 뒤쫓던 신관들이다. 그들은 악마의 파편을 줍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체 속에서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정신을 잃은 생존자의 피가 흐르자 악마의 파편도 같이 깨어났다. 악마의 부하들도 그 순간 깨어났다. 악마의 괴물들은 신관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가 음습한 동굴 속에서 비뚤어진 인간의 욕심들과 만나 덩치를 키웠다. 작은 괴물이 큰 괴물이 되고 큰 괴물이 더 큰 괴물이 되었다.
그래도 노인의 의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굳건한 대지와 동화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은 괴물로 들끓어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의지를 욕심으로 더럽힐 뿐이다.

그 때 조각난 악마가 속삭였다. 어미를 잃고 죽어가는 아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어미를 살리고 싶으면 나와 함께 하자. 나와 함께하면 슬플 일이 없으리. 나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자. 영원한 생명을 얻자.

대지와 뒤섞인 노인의 의지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돌처럼 굳어진 노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마침내 어린 소년이 악마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순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악마가 웃었다. 아이의 영혼과 결합해 아이가 된 악마가 웃었다.

-나는 불사를 얻었노라. 나는 이제 죽은 자가 아니다!

사악한 웃음소리에 노인의 의지가 깨어났다. 노인은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대지와 하나가 된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악마를 죽이지 못했다. 그의 의지는 방심하고 실패했다. 아이의 모습을 가진 악마를 그는 죽일 수 없다. 절망한 노인이 외쳤다.

-대지의 어머니이시여! 신들이 절 미워하시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농부의 아들, 대지의 아들입니다. 저 아이만은 구해주소서!

간절한 기도가 단단한 바위의 표면을 깨고 흘러나와 물줄기를 이루었다. 노인의 의지가 슬픔을 담고 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 호소했다.

-기적을 주소서. 자비로운 여신이여, 당신 밖에 의지할 이가 없나이다.

오쿠거는 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두 개의 물줄기 속에서 울고 있는 인간이 보였다. 기원하고 애원하는 인간.

그리고 오쿠거는 자신의 새로 생겨난 앞발 속에서 낯선 것을 발견했다.

노란 빛을 뿜는 단순한 형태의 메달.

대지의 여신 밀레노아의 신관인이었다.

 

아이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쿠거?”

쥐고 있던 오쿠거의 앞발이 꿈틀했다. 오쿠거의 앞발은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꿈틀하다말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한 기분에 그는 황급히 오쿠거의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 오쿠거다. 손가락을 코에 대 보니 다행히 숨결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자는 건지 혼절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는 오쿠거의 목에 매달린 쿠헤르트의 신관인을 살펴보았다. 혹시 진정시키려고 대지의 신관이 술수를 써서 재운 것일까?
노란 빛이 감도는 은빛 메달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키나, 오쿠거가 일어나지 않아.”

“지쳐서 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쿠거에게 이곳의 기운은 너무 강하니까요.”

“강하다고?”

“인간의 의지가 신과 자연의 섭리까지 억누르고 있는 지역입니다. 자연의 자식인 오쿠거에게는 피곤한 곳이지요.”

“그, 그럼 괜찮은 걸까?”

“네.”

안도한 그가 얌전히 걷기 시작하자 키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물이 흐르는 벽은 여전히 맑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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