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m 책

Accessibility Link

관련 서비스들

목차


NEW
이수영 | 월~금 연재RSS

싸우는 사람

“문이다.”

일행들이 모두 녹초가 되었을 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암벽을 깎아 만든 계단은 축축한 습기에 녹아 발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았지만 인간의 손이 닿은 계단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 계단 위에 놀랍게도 문이 있었다. 횃불을 가까이 가져가자 나무도 쇠도 아닌 기묘한 재질이 보였다. 가죽에 가깝긴 했지만 하도 얇고 푸석거려서 누르자 퍽퍽 구멍이 뚫렸다.

“사람의 가죽 같습니다.”

로드가 덤덤하게 말했다. 옆에 있던 뷔르겐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사악한 것들!”

로제스가 낮게 욕하며 문을 열라 재촉했다. 가장 앞에 있던 로드가 횃불을 가까이대고 문을 열자, 먼지가 뿌옇게 날아올랐다. 시야를 가리는 매캐한 먼지에 로제스가 기침을 하자 로드가 손을 뻗어 정화 마법을 시전 했다.

“괜찮습니까?”

프라이스가 피까지 토하는 로제스를 돌아보며 묻자 전쟁의 신관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거는 얼결에 키나를 감싸 자신의 뒤로 돌렸다. 뿌옇게 이는 먼지는 익숙한 것을 연상케 했다. 불길했다. 옷자락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그는 조심스레 키나의 손을 잡았다. 정화마법을 쓰자 먼지는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주루룩 아래로 내려앉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방안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늘어선 서가였다. 방안 전체를 아우르는 엄청난 양의 서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지경이었다.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방을 보며 그들은 횃불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넓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가 어려웠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깊었다. 줄줄이 늘어선 서가 사이를 조심스레 걷던 그들은 곧 벽을 만났다.

“이게 다야?”

로이브가 중얼거리자 횃불을 들고 있던 로드가 낮게 말했다.

“이거, 벽이 아닌 것 같군요.”

“응?”

그들의 앞을 막아선 벽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단단해 보이던 벽이 주욱 손바닥만큼 뒤로 밀려났다. 풀썩 먼지가 일었다.  

조심스럽게 바닥을 살피자 로드의 말대로 벽이 아니라 방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가죽으로 만든 커튼이었다. 어두워서 벽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가죽 커튼을 만지던 뷔르겐이 ‘우우’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것 역시 가죽인데 어떤 가죽일지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소.”

유달리 미끈한 가죽을 두 손으로 밀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뷔르겐의 두 손목과 목에 줄이 생겼다. 빨간 줄은 순식간에 굵어지더니 촤악 소리를 내면서 그의 머리와 두 손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헉!”

바로 뒤에 있던 로이브와 로제스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일행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횃불을 들고 있던 로드의 머리 위로 시뻘건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기둥처럼 서 있던 뷔르겐의 목 없는 시체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검붉은 피가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가죽 커튼에 달라붙었다. 회색에 가깝던 미끈한 가죽에 묻은 진득한 피가 줄줄 흘렀다.

잠시 동안 일행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뷔르겐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그들의 발치까지 흘러 발끝을 적셨다.

“마, 맙소사!”

프라이스가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그가 급히 기도문을 외는 동안 냉정한 두 전쟁의 신관들은 주변을 살폈다.

“뭐야?”

“누가 공격한 거지?”

“살기도 기척도 없었는데.”

재수없게 피를 뒤집어 쓴 로드가 벽면을 향해 횃불을 들이댔다. 벽면은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뭐가 나와 뷔르겐을 반으로 쪼갰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저기 살피다가 지친 일행들은 일단 커튼 안쪽에 뭐가 있을 지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언데드도 괴물도 없지만 함정은 있었던 모양이군.”

키나를 흘긋 보며 비꼬듯 말하던 로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만치 굴러간 뷔르겐의 머리를 주워 온 프라이스가 쓰러져 있는 시체에 목을 붙이고 시신을 정리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 신관이라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는 생명의 신관이지 전쟁의 신관이 아니었다.

“아아, 오카리나님.”

그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동안 아이거는 키나의 손을 움켜 쥔 채 이를 악물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기사의 몸에서는 거품이 섞인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앞으로 가야만 할까? 아이거는 키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고 축축했다.

살아남은 이는 이제 6명뿐이다. 작게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로드가 횃불을 가죽 커튼의 밑에 들이댔다. 그가 무릎을 꿇고 커튼을 젖히자 다른 방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갑자기 날아드는 흉기는 없었다.

그들은 엎드린 채로 조심스럽게 기어서 가죽 커튼 밑으로 파고들었다.

일행의 뒤를 따르던 아이거는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미지근한 액체가 스며들었다. 비릿하고 끈적한 피. 그에 더럽혀진 옷자락.
익숙해서 거북하다.

커튼 너머의 방은 아무 것도 없었다. 로드가 벽면을 더듬거리다가 등잔을 발견하고 불을 붙이자 뜻밖에도 불이 붙었다. 등잔에 기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탓에 냄새가 지독하긴 했지만 일행 중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새책공감

오늘 본 책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