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잔 불빛 아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방 안에는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오래되어 삭은 나무 상자였다. 제법 큰 크기의 상자들은 이십 여개나 되었는데 그 안은 모두 비어 있었다. 보물이나 있을까 싶어 들여다보던 로이브가 쓴 웃음을 머금었다.
“사형, 진짜 신전의 늙은이들이 알면 기함을 하겠네.”
“지원했던 주신전의 귀족 나리들도 쓰러지겠지. 있는 거라곤 먼지뿐이니 말이야.”
“아아, 보물은 부스러기도 없어.”
“가난한 도망자들에게 그런 걸 바란다는 게 무리 아니야?”
두 사람이 웃는 동안 로드는 조심스레 벽과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아까처럼 뷔르겐을 살해한 장치가 튀어 나올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이제 끝 아니야?”
아이거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말하자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신관들의 시선을 받은 그는 놀라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 수는 있었군.”
로제스가 놀리듯 말하더니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로드와 함께 바닥과 벽을 살피는 동안 키나는 두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말없이 그녀의 옆에 달라붙어 있던 아이거가 슬그머니 물었다.
“괜찮아? 아픈 곳은 없고?”
“괜찮습니다. 외상도 대단치는 않고.”
그녀는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팔뚝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대답했다. 문득 아이거는 짙은 피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그것이 오쿠거의 후각에서 전해진 감각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고약한 느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냄새가 지독해.”
그가 중얼거리자 키나가 움찔했다.
“무슨 냄새 말입니까?”
“피 냄새 안 나?”
“그야 물론....”
그녀는 방금 전 죽은 뷔르겐의 시체를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피 냄새입니까?”
“아, 신선한 피 냄새는 단내가 나지만 이건 썩은 내 같아.”
얼결에 대답하던 그를 보고 키나의 얼굴이 굳었다.
“모두들 조심하십시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놀란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두르자, 창백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방 안 전체를 향해 한 번 더 손을 휘둘렀다. 푸른빛이 번개처럼 번뜩이다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별 반응은 없었다.
“뭘 한 거요?”
로이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키나의 얼굴이 진중하게 굳었다.
“이 안에는 일말의 파편도 없군요.”
“무슨 소리요?”
“이 곳에서 썩은 피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근처에서 꽤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오래 전의 일이라 해도 고통스럽게 죽은 자의 파편은 남습니다. 게다가 방금 전 뷔르겐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커녕 파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런 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리둥절하던 신관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재빨리 무기를 쥔 채 주변을 살폈다.
방 안은 텅 비어 있다. 쌓여 있는 상자들도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절로 긴장한 아이거가 키나의 앞을 막아 선 채 굳자,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팔뚝을 위로하듯 툭툭 쳤다.
살생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방패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적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어둠과 정적,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긴장과 공포가 그들 사이를 맴돌며 조롱했다. 아이거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단련된 신관, 그것도 전투에 단련된 신관들인 것이다.
“오카리나님. 도와주소서.”
낮게 프라이스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덜 떨리는 그의 무릎과 손도 보였다. 잘생긴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 있다.
피냄새가 짙어진다.
아이거는 콧등을 찡그렸다.
오쿠거의 후각을 빌어 느끼는 감각이 그를 소스라치게 했다. 오쿠거가 자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것일까? 유달리 예민해진 오감이 섬뜩했다.
‘오쿠거! 정신 좀 차려봐. 오쿠거!’
불안해서 자꾸 불러도 오쿠거는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 고약한 냄새는 뭘까? 오쿠거가 있다면 말해줬을 텐데. 오쿠거가 이렇게나 반응이 없는 것도 그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이거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텅 빈 상자에서 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자가 쌓여 있는 바닥이다.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모두들 다른 곳만을 보고 있었다. 아이거는 몸을 낮춘 채 검을 상자 쪽으로 돌렸다.
“뭔가 봤소?”
그의 모습에 작게 프라이스가 물었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뭔가가 긁는 소리가 났다. 오래 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눈알이 타는 것 같은 충격에 아이거는 눈을 감고 키나를 감싸 안았다.
강렬한 빛은 수백의 칼날이 되어 두 눈을 난자했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그는 신음을 흘렸다.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은 갑작스런 빛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눈물을 흘려댔다. 그 사정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가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다들 괜찮소?”
로제스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던 그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가를 소맷자락으로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온 사방이 다 환했다. 뿌연 눈을 비비면서 그는 주변을 살폈다. 키나의 작은 몸을 자신의 몸으로 가리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헉.”
낮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거는 고개를 돌렸다. 밝은 곳에서 보는 로이브의 얼굴은 끔찍했다. 검붉은 핏자국이 전신을 덮고 있었다. 여기저기 입은 상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아 만신창이였다. 로드와 로제스의 모습도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곳에서는 잘 몰랐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머리칼이 잿빛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거는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키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말았다.
그들의 바로 뒤에 프라이스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쪽은 바닥에 누워 있다.
“맙소사.”
절로 비명이 튀어 나왔다.
검붉은 피가 바닥을 타고 흘러 키나의 발치까지 흘렀다. 쏟아진 내장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얼마나 순식간에 베어진 것인지 그의 하반신은 서 있고 상반신은 바닥에 쓰러져 있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 중 아무도 프라이스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하아, 하아....”
로제스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이거는 덜덜 떨면서 키나를 꽉 끌어안았다. 프라이스의 시체를 바라보는 그녀는 표정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만큼 남의 죽음도 담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횃불을 끄던 로드가 헐떡이는 로제스의 가슴에 치유력을 내뿜었다.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손은 덜덜 떨렸다. 어지간한 로이브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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