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 안을 밝힌 빛은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신이 나자, 로이브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바닥에 고정되었다.
“맙소사.”
그의 말에 일행들의 눈도 바닥에 고정되었다.
그들의 발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프라이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가죽 커튼 너머 놓여 있는 뷔르겐의 시체에서부터 흐르는 피도 있었다. 두 사람의 피는 바닥에 패여 있는 작은 홈을 따라 합쳐지더니 매끄럽게 흐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신관들의 피가 방 안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밝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로이브는 자신의 발밑으로 흐르고 있는 가느다란 핏줄기를 일부러 발로 짓밟아 멈추게 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홈이 깊었는지 그가 발로 밟아도 피는 여전히 홈을 따라 흐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거, 진으로 보이지 않나? 마법진으로 안 보여?”
로이브가 미친 듯이 외치자 로드가 갑자기 옷자락을 찢어 바닥에 대고 짓눌렀다. 피로 그려지는 마법진이라는 것이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그가 옷자락을 들어 마구 문질러대도 피는 계속해서 홈을 타고 흐르며 그림을 그렸다. 방안 전체에 낯선 형태의 그림을.
어느 순간 흐르는 피가 멈췄다. 일행들의 숨도 멈췄다.
“무슨, 무슨 의미의 진인지 아는 사람 없어?”
로제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다. 그 때 갑자기 로드와 로제스가 서 있던 자리가 왈칵 소리를 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비명과 함께 로제스와 로드가 한데 엉켜 뒤로 쓰러지는 순간 로이브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싹둑 소리를 내면서 로이브의 팔뚝이 잘려져 나갔다.
“아악!”
아이거는 급히 그의 허리를 안아 뒤로 당겼다. 피가 철철 쏟아지는 로이브의 오른 팔이 바닥에서 퍼덕였다.
“사형!”
그들의 눈앞에서 바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급경사를 이루는 바닥에 미끄러지며 로제스와 그를 감싸고 있는 로드의 몸이 줄줄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악을 쓰는 로이브의 음성이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의 몸이 경사면의 끝,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로제스의 반백이 된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두 사람의 신관은 곧 끝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철컹.
세 사람은 이제 반 토막이 된 방 안에 서 있었다. 제법 넓었던 방은 어느 새 낯선 형태를 이루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아래로 매끄러운 경사면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 경사면의 끝은 로제스와 로드가 사라진 구멍이다.
바닥에 그려진 피로 만든 그림은 원과 알 수 없는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원진을 바라보면서 키나는 낮게 신음했다.
바람이 불었다. 잔뜩 굳어 있던 아이거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바랜 갈색 튜닉에 낡은 가죽신을 신은 소년이었다. 단정하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얼굴에 주근깨가 몇 개 남아 있는 소년.
“안녕하세요?”
낭랑한 음성에 얼어붙은 침묵이 깨졌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 순박하게 웃는 표정이 어울렸다.
“전 계곡 마을에 사는 엔테라고 하는데요, 저의 어머니 혹시 못 보셨나요?”
낯선 이가 거북한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호리호리 마른 체구에 거친 손마디가 소년의 오랜 노동을 말해주고 있었다. 곡식을 거두는 들판이나 물을 긷는 마을의 우물가에서나 볼 법한 소년이었다.
“넌, 누구냐?”
지혈을 마친 로이브가 창백한 얼굴로 소년을 노려보며 물었다.
“전 엔테라고 했잖아요? 어머니를 찾고 있어요. 모두 신관님들이시죠?”
소년은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방안 구석에 쌓여 있는 상자를 밟으며 걸어왔다. 그제야 일행들은 이 방 안의 천정이 꽤나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높은 정도가 아니다. 까마득히 위로 뚫려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두워서, 나중에는 너무 밝아서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소년이 서 있던 곳에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은 나선형을 그리며 위로 뻗어 있다. 얼마나 높은지 하늘까지 닿을 듯했다.
“괴물들이 마을을 덮쳐서 어머니랑 둘이서 도망쳐 나왔어요. 그런데 여기 어디에서 어머니랑 헤어졌는데...어머닐 못 보셨나요?”
어느 새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소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닥쳐! 네 놈의 정체가 뭐냐!”
악을 쓰며 로이브가 묻자 소년이 미소 지었다.
“엔테라고 했잖아요. 계곡 마을의 생존자라고요.”
“닥쳐! 거짓말 마!”
“몰라서 그렇지 있었어요. 바로 나요.”
소년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아, 그런데 저기 누가 또 누워 있는 거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프라이스의 반 토막 난 시신이었다. 소년은 그 곁으로 다가가더니 프라이스의 상반신이 쥐고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끔찍도 해라. 가여운 신관이시군요.”
소년의 가느다란 손목에 전투 신관의 검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로이브는 눈을 부릅떴다. 전투 신관의 검은 신관인이 새겨진 것으로 신성력이 깃든 특별한 물건이었다. 부정하거나 사악한 존재는 만지지 못한다.
소년은 천연덕스럽게 신관의 검을 쥔 채 한 걸음 다가왔다. 빙긋 웃는 얼굴이 순진했다.
“이거 진짜 검인가요?”
“너....너는 진짜 누구냐?”
소년은 언데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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