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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 월~금 연재RSS

싸우는 사람

어떤 남자가 사소한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다.
허나, 감옥에 갇혀 있던 남자는 기회를 보아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가 탈옥하자 감옥을 지키던 왕의 병사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그를 추적했다.
그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결사적으로 달아났다.
달려드는 병사들에게 쫓겨 그는 사자 떼가 들끓는 들판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굶주린 사자가 달아나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이번엔 사자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거친 황야를 지나고 가시로 뒤덮인 덩굴을 헤치며 남자는 사자를 피해 뛰고 또 뛰었다.
사자 역시 며칠간 굶은 터라 모처럼 찾은 먹이를 포기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따라왔다.
마침내 남자는 산꼭대기 절벽까지 내닫고 말았다.

바로 앞은 절벽, 뒤에는 굶주린 사자.

남자는 절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굵은 넝쿨을 쥐고 사자가 덮치기 전에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가 위를 보니,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안도한 남자는 넝쿨이 절벽 아래까지 뻗어 내려간 것을 보고 천천히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간쯤 왔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다.
절벽 바로 아래에 대여섯 마리의 늑대가 입을 벌린 채 그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굶주린 늑대 떼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가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심산인지 느긋하게 앉아 그를 주시했다.
겁에 질린 남자는 달아날 곳을 찾으며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남자는 그리로 몸을 기대려 손을 뻗었다가 깜짝 놀랐다.
검은 구멍 안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렸다.
독아毒牙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독사들을 피해 남자는 결국 절벽에 매달린 채 넝쿨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매달린 넝쿨에 두 마리 들쥐가 달라붙어 열심히 갉아 대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남자는 쥐를 쫓으려 손을 뻗어 버둥거렸다.
굵은 넝쿨은 점점 더 빨리 갈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남은 힘을 쥐어짜 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쥐를 빨리 쫓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것이 뻔했다.
그가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하는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입가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그것은 정녕 달콤하기 그지없는 액체였다.

매달린 남자는 고개를 길게 빼고 위쪽을 살펴보았다.
가파른 절벽 한가운데 벌집石蜜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벌집에서 흐른 꿀이 절벽 가로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굶주린 남자는 귀한 꿀맛에 혹하여 혀를 내밀고 바위로 손을 뻗었다. 힘든 탈주 끝에 맛본 꿀맛에 상황을 잊은 남자는 넝쿨을 갉고 있는 들쥐들도, 구멍 속의 독사도, 절벽 위의 사자도, 절벽 아래 도사린 늑대 떼도 잊었다.
그는 오로지 달콤한 꿀을 먹기 위해 몸을 내밀고 머리도 내밀고 혀도 내밀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꿀은 천상의 맛을 자랑했다.
달콤하고 달콤한 맛.
넝쿨은 갈라지고 찢어지며 생명의 시간은 줄어든다.

찰나刹那 찰나刹那 줄어드는 목숨.
그럼에도 인간은 눈앞의 단맛에 모든 것을 잊는다.
그것이 인생人生.

 

 


그는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일 거라 상상하고 또 절망했다.
그러나 돌아왔다.
손아귀가 아직도 저려 온다. 이제 고통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몸은 여전히 비명을 질러 댄다. 얼룩진 몸 위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것은 땀인가 피인가. 그도 아니면 눈물일까.
그는 비명을 질러 대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통증으로 명멸하는 기억을 억지로 되살렸다.
간수의 재촉에 족쇄를 질질 끌며 어둡고 긴 통로를 걸었다. 악취와 비명이 뒤섞인 넓고도 환한 곳으로…….
그곳은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눈이 부셔서 현기증이 이는 아득한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지옥이 있었다.


제 1 장  214번


그의 이름은 214번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나이도 고향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간수가 들어와 밖으로 밀치면 싸워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세계는 아주 좁았다. 질질 끌리는 사슬을 달고 다섯 걸음을 걸으면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다다른다. 시커먼 얼룩이 잔뜩 묻은 네모난 그의 돌방은 한 사람만으로도 가득 찼다.  회색 벽과 용변용으로 뚫려 있는 손바닥만 한 구멍, 마른 짚과 냄새나고 얼룩진 모포가 깔린 돌 침상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는 항상 혼자였다. 물론 아주 희미한 기억 속에 가끔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여자들이 들어와 그와 뒹군 적도 있었다. 그리고 더 멀고도 먼 기억 속에는 누군가 다정히 손을 맞잡았던 이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곁에 없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차가운 돌바닥과 냄새나는 모포가 전부였다.

214번은 가끔 악몽을 꾸곤 했다. 하루에 한 번 음식과 함께 주는 마약이 섞인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면 진땀을 줄줄 흘리며 발작처럼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친근한 웃음을 짓는 친구의 목을 베고, 엄한 얼굴을 한 스승의 몸을 갈라 내장을 뽑았다. 아직 어린 소년의 몸통을 갈라 피를 마시기도 하고 슬퍼하는 여인의 옷자락을 찢어 강간을 하기도 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나긴 악몽에서 겨우 깨어나면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는 간수들이 그를 기다렸다. 그러면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간수의 재촉에 따라 철컥거리는 족쇄를 차고 네모진 돌방을 나가 음습한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좁고도 낮았다. 키가 큰 그는 항상 몸을 웅크리고 걸어야 했다. 몸을 돌리는 것도 힘들 만큼 좁았지만 그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간수들은 그런 사정을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등과 허리를 꼬챙이로 쿡쿡 찌르거나 손때로 반들반들한 가죽 곤봉으로 후려쳤다.

그는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알지 못했다. 시야는 흔들렸고 머리는 항상 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의 의문은 단순했다. 왜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만큼 긁히고 찢어져 굳은살이 박였는데도 왜 아픔은 여전한 걸까. 이미 굳은살이 박인 발목은 굵은 쇠사슬이 질질 끌릴 때마다 매번 아팠다. 간수들이 내리치는 곤봉 역시 맞을 때마다 아프고 짜증이 났다.

덜컥덜컥 키이이익. 음습한 좁은 복도를 지나 검붉은 녹이 묻어나는 굵은 쇠창살이 박힌 방에 도착했다. 방 안에는 비린내와 쇠 냄새가 뒤섞인 무기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손질을 하지 않아 날이 무뎌진 날붙이들은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악취를 뿜었다. 하지만 무기들은 보기에만 험악할 뿐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세차게 휘두르면 손잡이가 부러질 것 같은 도끼나, 무뎌지고 이가 나간 검과 칼. 이미 반쯤은 부서진 방패와 손때가 묻어 번들거리는 곤봉.
그는 여기 있는 무기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기란, 잘 준비되었을 때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특히, 분에 겨운 상대를 맞이했을 때는.

“골라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조련자가 말했다.
조련자는 그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고 싸울 상대를 정해 주는 작자였다. 때로는 훈련을 시키거나 무기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214번은 한 번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의 조련자는 항상 웃었고 그때마다 그는 죽을 만큼 다치고 고통을 받았다.

“오늘은 양날 도끼를 쓰는 것을 권하겠다. 214번.”

조련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권했다. 그 웃음과 달리 그의 팔뚝은 단단하고 강인했으며 육체는 살육의 경험으로 단련되어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214번은 조련자에게 열 번 정도 덤볐고 여덟 번 정도 죽을 뻔했다. 덕분에 그는 조련자가 웃을 때마다 공포를 느꼈다.

그는 말 없이 조련자가 권하는 대로 양날 도끼를 들었다.
도끼 자루는 까맣고 반질반질했다. 피라도 묻는다면 미끄러워서 당장에 놓칠 정도로. 그는 도끼 자루와 무딘 도끼날 사이에 묻어 있는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낯익은 무기인 것을 보면 이 도끼는 그가 자주 쓰던 무기인 듯했다. 하지만 기억은 여전히 희미했다. 익숙하게 손에 달라붙는 감각만 선명할 뿐이다. 도끼 말고도 그는 적당한 길이의 단도를 하나 더 집어 들어 벨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도끼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일. 그는 여유가 되는 대로 벨트 사이로 단도를 두 개 더 집어넣으며 낡은 나무 방패를 하나 왼쪽 팔뚝에 끼웠다. 낡은 건틀렛을 끼고 다른 무기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조련자가 미소 지으며 재촉했다. 하얀 이가 드러나는 불쾌한 웃음이다.

결국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어린애 팔뚝만큼 굵은 쇠창살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귀가 멀 정도로 요란한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그 함성은 송곳처럼 그의 전신으로 와 박혔다. 좁은 복도와 돌벽에 부딪친 함성은 날붙이처럼 그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상처 입혔다. 

“너에게 걸었어.”

누군가가 그에게 외쳤다.

“이번에도 이기면 고기를 사 주마!”

또 어느 녀석이 말했다.

그는 그렇게 얼굴도 보이지 않고 들려오는 소음과 잡음 속에서 걸었다.

눈앞에 환한 빛이 떠오르면 그는 오늘의 지옥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환하고 끔찍한 지옥에 도착한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면 내일 다가올 지옥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 날 맞이할 지옥이 기다린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걷자고 그는 생각했다.
실제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기는 지옥.
나는 그냥 걷고 싸우고 먹고 자고 그리고…….
죽어갈 뿐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면서 어두침침한 통로를 통과하여 빛으로 걸어 나갔다.
빛이 환히 비치는 그 공간은 그가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겁에 질린 얼굴의 짐승들뿐. 그들 이외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아주 예전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적도 있었다. 파란 하늘은 너무 아름다워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죽을 고비를 넘긴 뒤부터 그는 하늘이 무슨 색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차츰차츰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수많은 얼굴들이 잊혀져 갔다. 사람들이 있었다. 친근한 얼굴도 있었고 사악하고 고약한 얼굴도 있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잔인한 자도 교활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그뿐이다.
살아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면 싸우고 살아남아야 한다.

미끄러운 도끼 자루에 힘을 주고 그는 천천히 양발을 벌렸다. 의미 모를 고함과 소음이 이리저리 뒤섞여 하얗고 무거운 덩어리가 되어 그를 후려쳤다.

꾸어어어―――

기다릴 것도 없이 괴성과 함께 날카로운 발톱이 다가와 바람 소리도 없이 가슴을 할퀴었다. 시뻘건 피가 튀어 올라 시야를 방해했다. 그는 뒤로 넘어지는 것만은 간신히 면했다. 살갗이 찢어진 정도가 지나쳐서 근육이 찢어져서 흐르는 피는 더 검고 더 농밀했다. 지독히 아프다. 뜨거운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멍하던 감각이 벼려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감각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함쳤다. 살아남아야 해! 죽으면 안 돼! 조심하라! 죽여라! 없애라!

그는 상처를 보는 대신 눈앞에 있는 것을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조련자의 웃음이 생각났다. 스산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하체를 뒤흔들었다. 온몸의 세포가 공포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라 소리쳤다. 전신에 난 털이란 털은 다 곤두선다. 조련자가 난데없이 양날 도끼를 가져가라 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일반적인 맹수가 아니었다. 사람도 물론 아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오크였다.
그는 벌벌 떨며 오크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은 것은 대담해서가 아니라 도망갈 곳이 없어서였다. 그는 소름이 돋아난 얼굴을 억지로 바짝 치켜들고 빈틈을 노리고 기다렸다.

사타구니만 가죽 띠로 가린 오크는 그보다 두 배는 될 체구였다.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오크를 마주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오크는 끈적한 타액을 송곳니 사이로 흘리며 그르렁댔다. 시뻘겋게 핏줄이 돋아난 둥근 눈알은 살의에 젖어 번들거렸다. 하지만 214번은 보았다. 오크의 등은 네 갈래로 갈라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단단한 허벅지에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미처 다 뽑지 못한 화살촉이 등과 팔과 복부에 박혀서 시커멓게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오크는 살아 있었다. 시퍼렇게 살기와 증오로 번들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214번은 도끼를 쥔 채 퍼렇게 빛나는 눈을 바라보았다. 눈 안에 흐르는 분노와 살의가 절망과 함께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오크의 무서운 눈빛을 피해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이었다. 그러나 창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낡아 빠진 양날 도끼뿐이었다.
그가 쥔 도끼가 오크의 옆구리를 찍는 동시에 오크가 그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렸다. 그는 고통으로 몸을 뒤틀면서도 멈추지 않았고 오크 역시 옆구리에서 피를 뿌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크의 거대한 손이 그의 머리를 휘감아 터뜨리기 전에 그는 방패로 오크의 상처 난 옆구리를 호되게 후려갈겼다.

퍽 하고 뜨거운 피가 튀기고 오크는 흠칫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이어 거대한 주먹이 그의 가슴으로 덮쳐 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피해 어깨에 매단 방패로 막아 냈다. 이미 갈라져 있던 원형 방패가 어깨뼈와 함께 부서져 흩어졌다. 그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크게 내지르는 대신 혀를 깨물었다.

입안에 피가 비릿하게 올라왔다. 그는 피가 섞인 침을 오크의 얼굴에 뱉으며 오크의 가슴에 도끼를 내질렀다. 허나 오크의 단단한 근육에 부딪친 피로 젖어 있던 도끼 자루가 먼저 부서지고 말았다. 도끼날은 허공으로 허망하게 튀어 올랐다.

허억 허억 고통에 가득 찬 신음 소리를 내며 그들은 마주 보았다.
내장을 찌른 부서진 갈비뼈가 배 속에서 흔들렸다. 오크는 전신에 화살촉을 박은 채 그의 공격을 버티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냥 오크가 아니었다. 오크 전사다.
그는 주먹을 쥐고 오크를 바라보았다.
오크는 여전히 살의에 가득 차 그를 노려보았다.
살의. 살의. 분노.
그 글자들이 그의 얼굴에서 아른거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돌진했다.

건틀렛을 낀 주먹이 부서져라 오크의 턱을 후려갈겼고 그에 상응하는 답례로서 다시 복부를 얻어맞았다. 내장이 터져 나갔을 것이다. 고통이 공포를 무너뜨렸다. 오랫동안 음식 속에 묻혀 있던 마약이 그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겨 일으켜 세웠다. 그는 달아날 새도 없이 오크의 손에 멱살을 잡히고 다시 한 번 턱을 얻어맞았다.
그는 허공으로 솟았다가 호를 그리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오크 전사의 완력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 전사는 없다. 무참하게 바닥으로 나뒹굴면서도 그는 턱뼈가 부서진 고통 따윈 느끼지 못했다. 마약은 그의 심장을 잠식하고도 모자라 그의 뇌까지 뒤흔들었다. 무뎌진 감각 속에서 한 가지 목표만이 우선했다.

살아야 한다.

쿵쿵대며 오크가 다가와 그의 가슴을 짓밟기 위해 큼직한 발을 치켜들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그는 손에 잡히는 모래를 오크의 얼굴로 흩뿌렸다.

오크가 크윽 하고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렸다. 그 눈에 흩뿌린 모래가 오크 전사에게서 유일하게 얻어 낸 신음이었다. 214번은 몸을 날려서 다시 도끼날을 잡았다. 짧아진 도끼 자루가 불편했지만 불평을 토할 새는 없다. 입에 피거품을 문 채로 그는 도끼를 들어 오크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마약이 그의 육신에서 뽑아낸 힘이 격렬하게 폭발했다.

퍼억 하고 소리는 크게 났지만 인간의 목처럼 단번에 잘리지는 않았다. 오크는 온 세상이 끝날 듯한 거대한 비명 소리를 울리며 비틀거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면서 그를 향해 손아귀를 뻗었다.

그는 그 손을 피해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단도를 들어 손잡이까지 틀어박았다. 단단한 살갗을 뚫고 근육을 자르고 뼈에 박힌 날붙이가 진동한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오크의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무시무시한 일격은 그의 왼쪽 귀를 스치며 벽에 가 박혔다. 그는 벽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뒤이은 진동에도 굴하지 않고 벨트 속에 있던 단도를 꺼내 오크의 눈에 박았다. 단말마의 절규가 오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를 강타했다. 보이지 않는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귀에서도 입에서도 코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고통에 지친 폐가 부글부글 거친 소음을 냈다.

눈앞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오크의 가랑이 사이를 겨우겨우 기어 나와 헐떡였다. 줄줄 흐르는 진득한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오크는 아직 살아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검푸른 피가 분수처럼 오크의 목에서 솟아나 희고 깨끗한 모래를 더럽힌다. 검푸른 오크의 피와 검붉은 인간의 피가 뒤엉켜 흐른다. 살려고 버둥거리던 거대한 생물은 그의 눈앞에서 비명과 피와 증오를 남기고 비틀거리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쓰러졌다.

얼어붙을 듯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엄청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믿지 못할 일을 본 관객들은 피와 광기에 취해 소리를 질렀고, 마침내 그의 귀에까지 닿은 함성은 채찍이 되어 그의 몸을 후려갈겼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오크의 피와 자신의 피가 뒤엉키는 것을 보았다.

깨끗한 모래밭 위에 흐르는 검고 푸른 피는 오크가 고통을 느끼면서 버둥거렸음을 잘 나타내는 듯 사방에 퍼져 있었다. 오크가 고통을 참기 위해 바닥을 기었던 흔적이 역력히 남은 모랫바닥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욱 하고 그의 붉은 피가 푸른 피 사이로 떨어졌다. 이미 아픔 따위는 거의 느끼고 있지 않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텅 빈 공간에 서 있는 것은 그 혼자뿐. 그는 자신이 흘리는 피 위에 서 있었다. 마약으로 뒤엉킨 감각 속에서 그는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툭툭 피가 떨어진다. 멍해진 귓가로 웅웅대는 소음이 스며든다.
나는 살았다. 나는 이겼다.

갑자기 그는 킬킬 웃기 시작했다. 날뛰는 마약이 그의 핏줄 속을 들쑤시며 돌아다녔다. 환영과 실재가 뒤엉켜 타래를 짓는다. 그는 문득 커커 하고 피를 뿜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웃음인지 울음인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겨우 살아남았다.

아니, 정말 살아남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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